33명 기생 금비녀·금반지 팔아 독립운동, 3천여 관중과 만세

통영의 만세운동은 신분의 차별을 넘어 남녀노소가 다 참여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1919년 당시 기생 신분으로 통영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야기가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여성 항일 운동이 최근 전국적으로 재조명 되는 가운데 통영의 기생들이 금비녀와 금반지를 팔아 자금을 마련, 3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 운동을 펼친 것은 역사적으로도 학계 이미 주목을 받고 있다.

통영에서 기생들이 단체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실은 독립만세운동에 나선 혐의(보안법위반)로 실형을 선고받은 기생 정홍도(본명 정막래, 당시 21세)씨와 이국희(본명 이소선, 당시 20세)씨에 대한 일제 재판부의 1919년 4월 18일자 판결문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정씨와 이씨는 1919년 4월2일 오전 10시께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기생조합소에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모아 자신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 함께 '기생단'을 조직했다.

정씨 등은 자신들의 금비녀와 금반지를 담보로 돈을 마련, 상장용(喪章用 장례식용) 머리핀과 초혜(草鞋 짚신), 광목 4필반을 구입, 이들에게 나눠준 뒤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같은 날 오후 3시30분께 통영군내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들 7명을 선두로 33명의 기생이 뒤따랐고 당시 통영경찰서 앞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합세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판결문에는 "피고 두 명은 경찰관의 제지에 따르지 않고 선두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함께 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담당판사는 판결문에서 '기생단 7명이 열광적인 기세로 군중의 최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쳤다'는 경찰의 보고서와 진술 등을 언급했다.

기생들은 판사와의 대화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통영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통영시지(統營市志)는 법정에 선 기생과 조선총독부 판사의 대화를 전하고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 본부(本夫)와 간부(姦夫)가 있는데 어느 남편을 받들어 섬겨야 여자의 도리에 합당하겠습니까?"

"물론 본부를 섬겨야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본부를 찾아 섬기려는 것이오."

통영시지에는 기생 이씨의 이 같은 대답에 "판사는 답변을 못하고 곧 퇴정하였다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정홍도와 이국희 등은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국가는 재판 기록문을 근거로 지난  2008년 이 두 사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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