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소년단의 기세가 드높다. 한류의 흐름이 그칠 줄 모르고 세계를 흔들고 있다. 한때의 유행이 아닐까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점점 더 보편화, 다양화되고 있다.

한국을 세계에 알린 한류 스타라 이름 붙일 만한 이들을 꼽으라면, 욘사마, 대장금, 박세리, 박찬호, 싸이, 김연아 등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한류 스타는 누구였을까? 사람마다 선호가 다르고 평가 기준도 제각각이라 섣불리 말하기 어렵지만, 신라의 최치원과 원효 스님, 조선의 추사 김정희, 현대의 윤이상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추사를 최고의 한류 스타로 치켜세웠다. 동아시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그의 글을 구하기 위해 애를 태웠는데, 그들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일으킨 바람이 별을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재기로서의 글씨가 아니라 그 속에 스민 문자향과 인문학적 성찰에 열광하였다.

추사는 인복이 많았다. 스승 박제가와의 인연에서 시작된 인복은, 젊은 시절 그의 삶과 학문을 이끌었던 청나라 학자 옹방강과 완원에게 이어진다. 제자들도 무척 많았는데, 역관, 중인 출신의 서화가들도 많았고, 양반 출신 제자들도 출중했다.

그랬던 추사가 제자 한 사람을 꼽아, 그의 글씨가 자신보다 낫다고 하였다. 그가 위당 신헌이다.

위당은 집안 대대로 무관이었으나 학식이 높고 글씨가 좋아 유장(儒將)이라 불리었다. 다산과 추사의 문하에서 실사구시의 학문을 닦으며 개화파 선비들과 교유하였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제작을 도왔다고 한다.

34세에 위당은 전라우수사로 부임한다. 바다 건너 제주에 추사가 유배되어 있을 때였다. 이때 이미 위당은 추사 서화의 영향을 받아 개성 있는 글씨를 익히고 있었다.

위당은 부임하자마자 추사에게 소식을 알리고, 유배 생활을 돕기 위해 수시로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었다. 추사의 감사 편지에는 그 고마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스승과 제자는 글을 주고받으며 가르침을 이어간다. 위당은 자신이 쓴 시와 글씨를 추사에게 보내어 가르침을 받고, 추사의 글씨를 받아 익힌다. 이렇게 해서 3여 년간의 교유가 끝날 즈음 위당의 서체는 새로운 경지로 올라선다.

하지만 더 큰 변화는 추사에게 일어났다. 10여 년의 유배 생활이 끝날 즈음 진정한 추사체가 완성된다. 두텁고 살진 획에서 기름기가 빠져나가고 골기 강한, 최고의 한류 스타를 만들었던 바로 그 개성 넘치는 서체를 얻게 된다.

통영 사람들은 복이 많다. 최고의 한류 스타가 치켜세운 위당의 필체를 가까이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그의 깊고 힘찬 글씨가 충렬사 주련으로 남아 있다. 욕일보천(浴日補天)과 맹산서해(盟山誓海)다. 명조팔사품 병풍 또한 그의 솜씨다.

위당은 제187대 통제사로서 1861년부터 1862년까지 통영에 머물렀다(제121화 '신관호 통제사, 역사를 쓰다' 참조).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