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편의 작품 세계 17개 교과서 수록,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예술의향기 지난 11일 김용식·김용익기념관서 추모제 봉행

"나는 꽃신이 다른 사람에게 다 팔려 가기 전에 한 켤레 가지고 싶었지만 꽃신 아닌 슬픔을 사지 않을까 두렵다. 나는 먹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기 직전 길을 더듬어보는 눈초리로, 꽃신을 바라보았다. 꽃신이 세 켤레 남았을 때 나는 그 곳에 차마 가지 못했다. 예쁘게 꾸며진 꽃신의 코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훌쩍 뒤돌아설 것 같아 더 이상 찾아 못 갔다."<김용익 단편 소설 꽃신 중>

한국인 특유의 감수성을 영어로 표현, 마술의 펜이라는 칭호를 얻은 '꽃신'의 소설가 김용익(1920-1995) 24주기 추모제가 지난 11일 태평동 김용식·김용익기념관에서 봉행됐다.

“고국 하늘만 바라봐도 눈물이 난다. 쇠똥에 빠졌던 고향의 그 골목길이 내 창작의 원천이다. 여행의 마지막 종점은 어릴 적 뛰놀던 고향 바로 통영 그곳”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처럼 그리워하던 고향집에서 통영예술의향기(회장 박우권) 주최로 조촐한 추모제가 진행됐다.

정성을 담은 헌다와 국화 한송이씩을 바치고, 선생의 작품을 윤독하는 것으로 위대한 작가의 문학세계를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기를 기원하는 시간이었다.

김용익 선생은 영어로 한국인 특유의 감수성을 표현한 1956년 단편 '꽃신'(The Wedding shoes)은 미국 하퍼스 바자에 게재된 후 영어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편 소설로 선정, 세계 각국에 19회나 소개됐다.

또 해녀, 행복의 계절, 푸른씨앗 등 발표한 작품마다 미국과 영국, 독일,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주목을 받아 세계 각국의 교과서와 문단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1962년 11월 24일 새터 데이 리뷰에서는 꽃신을 "한국 대지의 설화다"라고 정의했고, 마이애미 뉴스는 "이야기의 인상은 피카소의 La vie 같은 작품처럼 오래 기억되는 그림처럼 울려온다"고 평가했다.

또 뉴스 위크지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마술적'이라는 말 밖에 없다"고 표현했고, 캔사스시티스타는 "시적 소설 속의 소박한 생활", 애틀랜타 모닝뉴스는 "바다가 반주하는 원시(原始)라고 극찬했다.

김용식 전 외무부 장관 역시 "난 힘없고 가난한 신생 한국의 외교적 대변자였다면, 내 동생 김용익은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한국 정서를 세계무대에 당당히 알린 작가로 후세는 김용익을 더 오래 기억할 것"이라 생전 예언했었다.

생전 문학과 나라는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김용익 선생은 "사람 따라 다르겠지요. 노벨상을 받은 싱거는 작가에게는 테리토리(즉 영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 경우는 반드시 한국이라기보다는 그 배경이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통영 부근입니다. 어릴 적 시감(詩感)을 주던 곳, 그 곳이 제 영토같습니다. 그 영토는 늘 감동의 바이브레이션을 줍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생전에 그가 누린 세계적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번역과 저작권 문제로 독자들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타계 10주년 행사, 그리고 2009년 4월 타계 14주기를 맞아 민간문화서포터즈 통영예술의향기 주도의 추모제로 우리는 잃어버린 김용익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떠올렸다.

마침내 그해 9월 2일 '제1회 통영문학제 심포지엄 1부-소설가 김용익 선생 집중 조명'을 통해 1920년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소설가 김용익을 통영의 품으로 귀환시켰다.

결국 김용익 문학상도 제정됐다. 묘소도 찾았고 생가도 찾았다. 유족도 찾았다. 그리고 유품도 귀환하기 시작했다.

2012년 4월 11일 태평동 22번지 김용식·김용익 기념관도 완성, 선생이 우리 품으로 완전히 귀환했다. 2015년에는 김용익 전집도 발간됐다.

문화서포터스 통영예술의향기가 1년간 자료수집과 편집을 담당하고 통영시가 발간한 이 책은 18편의 단편과 희곡 1편, 중편 1편, 작가노트, 대담, 영문단편 4편, 서지학 연보, 사진 앨범 등 총 630페이지에 달한다.

또 지난해에는 남해의봄날 출판사에서 김용익 소설집 1 ‘꽃신’과 김용익 중단편 소설집 ‘푸른 씨앗’을 재 발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통영예술의향기 박우권 회장은 “2009년 처음 김용익 선생의 묘소를 찾아 첫 추모제를 지내고, 이어 다섯 번째 추모제를 이곳 기념관에서 봉행했다. 그때가 2013년이니 벌써 여섯해가 지났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질타와 배척에도 굴하지 않고 언어의 장벽마저 허무시고 마술의 펜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한국문학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시다 조용히 고향의 품에 돌아오신 김용익 선생님! 선생의 작품에서는 통영바다의 큰 울림이 들린다. 오늘 고향 후학들이 두 손 모아 추도의 염원을 바친다”고 추모했다.

또 “통영예술의 향기는 항상 같은 목소리이다. 우리 통영의 문화예술 자산을 바로 인식하고, 이 자산으로 인해 통영이 만리장성처럼 시대에 따라 쉽게 변하지 않는 관광순례의 고장으로 세세토록 복되게 살아남길 잘 가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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