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창<(사)숙의민주주의 환경연구소 소장, 시민기자>

초등 고학년 정도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좋을 옛날 이야기입니다. 자녀분들에게 소리내어 읽어주시면 좋아할 겁니다.

 

이순신 장군을 도와 나라를 구한 제주도 유랑민들 이야기 1탄을 지난주에 들려줬지? 오늘은 2탄을 얘기해줄께. 제주도 사람들이 사또의 횡포를 못 이겨서 여기 통영 등 남해안의 섬으로 도망을 와서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바닷길을 훤히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이런 제주도 유랑민들을 전쟁에 활용한 덕분에 전투에서 한번도 지지 않고 이길 수 있었어. 그게 정말이냐고? 제주도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이영권 선생님이 2013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에 나온 내용이니까 믿을 만하지 않니?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 우선 얼마나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여기 남해안에 살고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대왕 시절 1434년 제주도 인구가 63,474명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엔 22,990명밖에 안되었대. 그러니까 4만명 정도가 제주도를 떠나간 거야. 그 사람들이 모두 남해안으로 왔냐고?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어. 하지만, 1510년 조선왕조실록엔 김해의 도요저리라는 마을에 사는 제주도 사람이 1천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또한 제주도 유랑민들이 남해안에 살고 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나와. 그러니까, 많은 수의 제주도 유랑민들이 남해안에 살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럼 제주도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어떻게 도왔는지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 제주도 사람들은 (1) 수로 안내인, (2) 선박 조종인, (3) 전투병, (4) 정보 제공인, (5) 밀사 등의 역할을 하면서 도왔대. 1592년 5월 4일 난중일기에 보면 임진왜란 첫 출병 때 85척의 배를 타고 갔는데, 그 중 제주도 사람들이 이용하는 포작선이라는 배가 46척이었대. 배의 반 이상을 제주도 사람들의 배로 정한 이유는 제주도 사람들이 물길도 잘 알고, 배를 잘 조종하기도 하고, 또 제주도 사람들이 만든 배가 가볍고 빠르기 때문이었대. 1593년 8월 10일에 이순신 장군이 왕에게 쓴 보고서에 보면 <건강하고 활 잘 쏘며 배도 잘 부리던 토병과 포작>이라는 표현이 나온대. 여기서 토병은 원래 남해안에 살던 어민들이었고, 포작은 제주도 유랑민을 뜻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제주도 사람들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 만하지?

 

이순신 장군은 백성의 목숨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대. 일본군은 칼싸움을 잘했기 때문에, 가까이 붙어서 싸우면 우리 병사들의 피해가 컸어.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주로 멀리서 대포를 쏘아서 적의 배를 침몰시키는 방법을 썼어. 우리 배를 학의 날개처럼 펼쳐서 대포를 쏘는 학익진 전법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온 거지.

 

제주도 유랑민들은 왕이 보낸 사또가 너무 많이 괴롭혀서 제주도를 도망친 사람들이었어. 이 사람들은 국가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이 사람들을 잘 설득했던 것 같아. “지금까지 국가가 당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 나라가 적에게 넘어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니, 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함께 싸우자.” 이순신 장군은 아마도 이렇게 설득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왕에게서 버림받은 제주도 유랑민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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