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읍을 비롯한 3개동을 차지한 '미륵도'는, 해저터널과 충무교로 연결되어 있어 언뜻 보아 육지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왜정 때 건설되었던 터널이 낡아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인도(人道)만으로 활용 되며, 오직 차량 소통은 2차선인 충무교(橋) 하나 뿐 이였다.

미륵도가 인구를 비롯한 모든 비중이 시가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데도, 2차선인 충무 교 하나에 의존한다는 것이 지극히 불안전한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차량이 차츰 급증하자 출퇴근 시간과, 공휴일에 관광객이 몰려올 때면, 정체 현상 때문에 그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

그래서 1994년부터 예산상 어려운 사정임에도 통영대교 가설을 추진하기로 하고, 전임 관선시장 때부터 착공을 서둘렀던 것이다. 마침 그 이듬해, 민선시장으로 본인이 부임하여 중간에서 자동 인수를 받게 되었다.

공사 규모는, 교량의 총 길이가 591m, 너비는 20m, 접속도로가 1,180m 이다. 사업비는 총 471억 5천 6백 만 원 이었으며, 그 중 국비 지원은 104억 6천 8백 만 원이었다. 교량 가설 방법도 설계팀의 선진지 견학을 통하여 새로운 공법을 선택했다.

현지 기본 공사와는 따로, 조선소에서 제작된 아치(arch) 부분은 총 무게가 3천 톤으로서, 그 당시 국내에서는 본 구조물을 인양할 수 있는 크레인이 없었다. 그래서 삼성중공업에서 4천 톤 급 대형 해상크레인을 별도로 제작하기도 했다.

결국 이 공사로 하여금 국내 중요 해상 공사 토목 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킨 계기도 된 셈이다.

그런데 공사기간 중 IMF 사태로 공사비 중 국비지원이 중단되어 공사 전체를 중단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 했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중단될 때까지 확보하지 못했던 사업비는 총 240억 원이었는데, 적극적인 조치와 건의로 그것을 보조가 아닌 정부의 재정특별 자금으로 어렵게 확보하여 완공할 수 있었다. 이 난제(難題) 해결을 위하여 당시 경제기획원 변양균 국장께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제작된 아치(arch) 부분은 조선소로 부터 초대형 크레인 장치로 이동시켰다. 아치의 양 끝이, 육지의 양쪽 해변에 제작된 시설과 연결되는 순간은 초 긴장상태였다. 그 무거운 시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어져야 하는 공정이기에 이쪽과 저쪽이 허공에서 만나 하나가 되는 과정을 크레인 조정실에서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다. 은하수를 타고 만난 견우와 직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이별해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눈앞의 대교는 찰나가 기어코 영원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공법이라는 것 때문에 전국의 기술진들이 다 모여, 순간의 광경 앞에서 숨을 죽였다. 드디어 성공적으로 완공한 후, 이 작품은 금상을 획득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공사를 끝내고 아치 부분에 비취빛 조명을 은은하게 넣었더니 주변의 환경과 어우러져 꿈결 같은 야경이 연출 되었다. 이렇게 하여 큰 숙원을 2001년 3월 31일에 완공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초청하여 준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

기왕 내킨 김에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음향 설치 전문가 '빌 폰타나'를 초청해 '사운드 브리지'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 공사까지 완공되던 날, 전국의 언론이 파격적으로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특히 그해 8월 14일에는 음향설치기념 공연도 펼쳐서 한산대첩 축제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귀를 기울이면 해일이 몰려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말발굽 소리, 물새 떼가 끼루룩대는 소리 등 기묘한 우주의 온갖 멜로디가 통영을 세계적인 관광휴양지로 부상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사운드 브리지로 하여금, 어려운 시기에 어렵게 설치된 대교가 더 귀하게 보이는 금상첨화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장 퇴임 후, 언젠가 그 '사운드 브리지'가 사라져 아쉬운 생각을 금할 길 없다.  그리고 통영 8경 중 제2경이던 격이 좀 떨어진 것이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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