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항일운동의 산실 통영청년단과 브라드밴드의 또다른 주역 '여병섭'

▲ 구 통영청년단회관(등록문화재 제36호)_한산신문 DB.

통영선교부 왕대선 선교사의 추천으로 진주광림학교 교사가 된 여병섭 장로는 통영에서 청년들에게 항일독립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고, 통영대화정교회 청년회 회장 박봉삼(朴奉杉)과 통영청년단 결성을 추진했다.

1919년 7월 21일 통영청년들 30여 명이 모여 통영청년단을 결성하고 초대 단장에 박봉삼을 추대하였다. 12월에 통영대화정교회 공동의회의 인준을 받고 여병섭은 시무장로가 되었다.

1920년 3월 1일 박영숙 목사, 왕대선 선교사, 여병섭 장로 3인으로 통영대화정교회 당회를 설립하고, 조선장로교 총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대화정교회 당회가 처음 한 결정은 3월 3일에 정량리에 기도실을 설치하고, 교회 제직원들이 돌아가면서 기도회를 인도하게 한 것이다.

4월 3일 통영청년단 임시총회에서 부단장에 선임된 후 여병섭 장로는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동아일보 통영분국장을 지내며 통영에서 항일민족운동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또한 4월 30일 그는 통영대화정교회 주일학교 교장, 소아회(小兒會)회장에 선임되었다. 대화정교회 당회가 두 번째로 한 결정은 비밀결사조직인 통영혈성단을 대화정교회 소속 남녀청년전도대로 운영하기로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또한 그는 통영애국부인회 고문으로써 최덕지 선생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통영청년단 부단장 여병섭 장로는 1920년 4월 거제 기성청년회(岐城靑年會) 주최로 '아반도(我半島) 청년의 사명(使命)'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고성청년회 주최로 '현대와 노력'이란 제목으로 강연하는 등 통영을 비롯한 거제, 고성지역의 청년회와 노동야학회의 설립과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통영에서 조직책(組織責)으로서 사명을 다한 여병섭 장로는 통영청년단 부단장직과 동아일보 통영분국장을 사임한 후 9월 24일 마산으로 이주하고 마산문창교회 장로가 되었다.

1921년 4월 통영청년전도대는 평양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취지서를 모방하여 경남전도회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한 후 통영유영인쇄소(統營柳營印刷所)에서 600매를 인쇄하였다.  

통영(統營)·남해(南海)·거창(居昌)을 비롯하여 경남노회 소속 교회를 통해 각지에 배포하고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통영청년전도대는 1921년 발각되기까지 활동을 벌였다.

경남전도대는 1921년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검거된 후 4월 13일 진주지청 제1호 법정에서 재판장 죽촌창계(竹村昌計)씨와 도변(渡邊), 장(張) 두 명의 판사가 배석했다.

석천(石川) 검사(檢事)가 피고들에게 각 성명·연령·직업·주소·원적을 물은 후, 먼저 박성애(朴晟愛) 목사의 심문으로 공판을 시작하여 그 외 다섯 명을 사실 심문하였다.

정성도(鄭聖道), 김정수(金禎洙), 강성화(姜性化) 홍수원, 고운서(高雲瑞) 등이 평양과 연락한 일을 심문하였다. 통영유영인쇄소에서 인쇄 배부한 경남전도대취지서(慶南傳道隊趣旨書)를 감정(鑑定)해달라는 변호사의 신청은 불허(不許)하였다.

같은 해 4월 20일 경남전도대 거창지회 서기 고운서에게 검사는 징역 2년을 구형하고, 판사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다른 사람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1년 8월에 대한국민회 통영전도대의 활동을 위해 통영대화정교회는 서양악기를 주문하였다. 통영군 조일정 김상수(金祥洙)씨에게서 금전을 빌려서 서양악기를 비치(備置)하여 전도(傳道)할 때와 기타 강연 등 필요시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동경에 머물러있는 모씨(某氏)에게 서양악기 등을 의뢰 주문했는데, 김상수에게 빌린 돈은 그 명목이 대부(貸付)이나 사실은 교회가 전액 기증을 받았다.

대화정교회 신도들은 김상수씨의 깊고 두터운 동정(同情)을 칭송(稱頌)하였다. 악기를 구입하고 박봉삼, 방정표, 양재원, 박성숙, 양기수, 강진호, 신수동 등이 '브라스밴드'를 조직하였다. 통영전도대와 통영청년단은 서양악대(西洋樂隊)를 앞세우고 거리행진을 하며 전도활동 및 청년단의 민족계몽사업 등 각종행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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