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삶의 공간이요, 삶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무한 확장의 샅바다. 바다는 위험하다. 속을 알 수 없다. 바다는 황홀하다.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은 세상 무엇도 견주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바다는 고맙다. 무궁무진한 진미를 차려주는 어머니다. 울다 들어온 등을 두드려 주는 할미요, 허기진 삶을 이어주는 탯줄이다.

통영은 물의 나라, 수국(水國)이다. 통영 사람은 바다의 사람들이다. 어업인과 반농반어 가구와 이들과 어깨를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통영이다. 바다 없는 통영은 존재할 수 없다. 통영의 꿈은 언제나 바다에서 시작한다. 통영의 꿈은 수렴하는 꿈이 아니라 발산하는 꿈이다. 뭍에서 잘 먹고 잘사는 꿈이 아니라는 얘기다. 뭍을 향한 꿈보다, 서울을 향한 꿈보다 바다를 향한 꿈은 언제나 크고 빛깔이 푸르렀다.

통영 사람은 바다에 익숙하다. 통영의 삶은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이야기다. 오대양을 누비며 진귀한 이야기를 낚아서 고향 선착장에 부려놓은 이들이 즐비하고, 이 땅의 이야기를 바다 건너에 심어 가꾸기도 하였다. 그래서 통영 사람의 꿈은 통영에서 성공한 적이 없다. 통영을 벗어난 머나먼 타향에서 빛을 발했다. '수국' 사람들의 운명이다.

표류기를 남긴 이들은 대게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식자층이었다. 표류하면서 만난 중국 사람, 베트남 사람, 마카오 사람들과 소통한 것도 한자를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생업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글을 써서 고통의 과정과 안타까운 사연, 만리타향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풍물과 풍속을 세세하게 기록한 그들이 있었기에 당대의 사람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놀라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바다 사람으로 살아온 통영 사람들. 통영 사람의 표류기는 없는 것인가, 찾지 못한 것인가?

통영 사람들은 왜 표류기를 아이들에게 읽히지 않는가? 바다의 땅 통영 아이라면 마르코 폴로를 읽기에 앞서 장철수 대장과 최부, 김대황, 장한철, 문순득의 표류기를 먼저 읽어야 한다. 이들의 글을 읽지 않으니, 스스로 한반도 남쪽 끝 작은 어촌의 자식인 양 한다.

고기가 넘치고 돈이 흘러 다니던 시절에는 유학도 가고, 출세도 하고, 고향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수국'은 언제나 든든한 뒷배였다. 하지만 어느새 서울로, 세계 유수의 도시로 나간 아이들 머릿속 통영은 '수국'이 아닌 한갓진 어촌 마을이 아닌가. 이순신 장군과 장철수 대장의 후예가 어찌 한낱 촌놈 행세하며 기죽어 살겠는가.

장철수 대장은 장사하러 떠난 것도 아니요, 관리로서 국가의 일을 보기 위해 배를 탔던 것도 아니요, 시험을 보거나 부친의 상을 당해서 배를 탄 것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1,000년의 역사를 되찾아 기억하고 복기하기 위해 뗏목을 띄웠다. 시류를 타고 노는 안전한 길을 두고, 세상을 거슬러 뱃길을 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진한 발해 1300호와 장철수 대장은 기억하면서, 정작 장철수 대장이 되찾고자 했던 발해의 역사와 항로는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지는 않은가?

저자주. 발해 해상항로 학술 뗏목 대탐사대 '발해 1300호' 기념비에 새겨진 항로. 기념비는 통영수산과학관 마당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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