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최북단은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북위 43°0’39”)이다. 한반도의 최남단 마라도에서 함경북도 온성군 북단까지의 직선거리는 1,146km. 독일 함부르크에서 이탈리아 피렌체까지의 직선거리(1,089km)보다 더 멀다.

최윤덕 장군이 두만강 주변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을 개척하였고,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 장군이 두만강 하류 쪽에 6진(종성·회령·온성·경원·부령·경흥)을 설치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두만강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하지만 조선 초의 정확한 국경선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풍서리에서 서남쪽으로 두만강을 거슬러 오르면 온성군 종성노동자구가 나온다. 그곳에는 북한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436호인 수항루(受降樓)가 있다. 조선 초에 처음 지어질 때는 뇌천각(雷天閣)이라고 불렸다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여진족을 무찌르고 이곳에서 항복을 받았기에 수항루라 고쳐 불렀다.

통제영 수항루는 출생할 때부터 한반도 최북단에 형제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숙종 3년(1677년) 제57대 통제사 윤천뢰 장군이 통영성 남문 밖에 누각을 짓고 봄가을마다 왜군의 항복 의식을 거행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을 1987년 지금의 삼도수군통제영 안에 이전, 복원하였다.

온성의 수항루가 형님뻘인데, 규모도 통제영 수항루보다 훨씬 크다. 1층은 정면 7칸에 측면 6칸이며, 2층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 3층은 정면 1칸에 측면 1칸이다. 통제영 수항루는 1, 2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풍서리에서 두만강을 따라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동해 바다가 나온다. 그곳 두만강 하구, 동해 바닷물이 넘실대는 곳에 녹둔도(鹿屯島)가 있다. 지금은 북한과 국경을 마주한 러시아의 땅이 되어 있지만, 이곳은 김종서 장군이 개척한 6진의 영역이었다. 이곳에 이순신 장군의 첫 백의종군의 역사가 서려 있다.

이순신은 32세에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 압록강 상류)의 권관(權管, 종9품)으로 병영 생활을 시작하였다. 몇 차례의 승진과 좌천을 겪다가 40세가 되던 1585년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바로 두만강 하구에 있는 곳이다. 1년 반 뒤인 1587년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하였으나, 북병사(北兵使)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백의종군케 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1월에 있었던 대대적인 반격 작전에서 이순신은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받아 복직되었다.

조선 말엽 녹둔도는 상류에서 흘러내려 온 토사가 쌓여 두만강 오른쪽 육지에 붙어버렸는데, 당시 조선-청-러 사이의 국경 분쟁의 결과 우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 귀속되어 버렸다. 제2차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1860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맺은 베이징 조약의 결과였다. 청나라가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기면서 녹둔도를 포함했다. 계속된 고종의 반환 노력은 무산되었고, 1990년 북한과 소련 사이의 국경협정에서도 반환을 요구하던 북한의 뜻은 관철되지 못했다.

저자 주. 사진 속 강 건너 지역은 한반도의 최북단인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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