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철수 대장과 발해 1300호가 출항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발해의 영토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가 1856년 이곳을 항구로 개척한 이후 러시아 극동함대사령부가 자리 잡음으로써, 한반도 주변에 세계 4대 강대국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698년 건국한 발해는 수도를 다섯 군데나 두었던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5경 15부 62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는 동경 용원부에 소속되었다. 그 중심도시는 지금 중국 땅 훈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남쪽으로 차로 3시간 가면 크라스키노 마을이 나온다. 고려인들은 연추마을이라 부르는 곳이다. 이곳 바닷가 풀숲에서 발해 유적 염주성(鹽州城)이 발굴되고 있다. 발해 때의 지명 염주가 구전되면서 연추가 되었으리라.

염주성은 소금 염자를 쓴다. 당연히 소금을 생산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발해에서 소비되는 소금 대부분을 이곳에서 생산했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일 수밖에 없다. 내륙 먼 곳까지 마차로 실어나른 동해바다 푸른 소금을 사람도 먹고, 가축들도 먹었을 것이다.

염주성은 일본으로 가는 교통로의 출발지이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229년 동안 발해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한 것이 34회, 일본에서 발해로 사신을 파견한 것이 13회였다. 발해는 외부와의 교역을 위해 다섯 개의 대로를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일본도다. 일본도는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훈춘)를 지나 러시아 연해주 남단 포시에트 만의 크라스키노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 관료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 머무르고,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신들이 머무르는 곳이었으니 이곳은 국가의 관문으로서 위세가 당당하고, 물물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국제도시였을 것이다. 발해는 주로 모피와 인삼, 꿀을 보냈는데, 발해산 담비 가죽옷은 일본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발해에서 보낸 '장경선명력'은 일본에서 800년 동안 농경생활의 지침이 되었다.

염주성을 떠난 사신들의 배는 주로 이시카와현(石川縣) 하쿠이군(羽咋郡)에 있는 후쿠라(福良)항으로 향했다. 후쿠라 등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로 유명하다. 겨울철 북서풍이 불 때 염주성에서 배를 띄우면 바람을 타고 쉽게 당도하는 곳이다. 하지만 바람이 거세어 절대 쉽지만은 않았다.

발해 사신이 처음 파견된 727년(제2대 무왕 8년), 고인의(高仁義) 사신 일행을 태운 배가 바람에 떠밀려 당시 일본의 적국인 도호쿠 지방으로 표류하는 바람에 몰살당하고 8명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갔다. 두 번째 사절단도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40여 명이 수장되었다. 이후로도 표류나 조난이 심심치 않았다. 776년 한 해에만 120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그만큼 겨울 해로는 풍랑이 드세었다.

발해 1300호도 바로 그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난파하고 말았다. 하지만 항해는 실패하지 않았다. 발해와 일본을 잇는 항로는 증명됐고, 이후 발해사는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한중일러의 삶에 고스란히 스며들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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