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100km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더불어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이곳은 발해 15부의 하나인 솔빈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연해주는 말갈의 땅이었는데,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과 함께 발해를 건국하면서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발해가 926년 멸망하자 여진족이 살면서 고려, 조선과 끊임없이 국경 갈등을 겪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로 가는 연해주 1번 국도를 따라가는 길, 우수리스크 못미쳐 라즈돌노예역을 만날 수 있다.

1937년 9월 17일 새벽 4시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기차에 올라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했던 통한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17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124대의 수송 열차에 실려 40여 일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황무지였다.

도중에 굶주림과 질병, 추위로 인해 어린이와 노약자들의 60%가량이 사망했고, 전체 사망자 수는 11,000여 명에 달했다.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도 몸 숨길 공간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토굴을 파거나 임시 가옥을 짓고 겨울을 나야만 했다.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이 전체 이주자의 1/3이 되었다.

하지만 죽음의 땅에서 기적을 일으킨 이들이 고려인이었다. 강인한 생활력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쌀과 야채, 목화를 재배하였다. 소련 중앙 정부가 놀랄 정도로 황무지가 옥토로 변해갔다. 소련의 전체 노력 영웅 1,200여 명 중에서 고려인이 75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발해 1300호가 출항했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도(日本道)를 거슬러 오르면 동경용원부의 중심이었던 훈춘을 지나 상경용천부(흑룡강성 영안)에 이른다. 발해에는 주변 나라로 통하는 5도(道), 신라도, 일본도, 당도, 영주도, 거란도가 있었다.

동경용원부에서 신라 땅 원산까지 39개의 역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라와의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발해가 거란족에 멸망하자 발해 역사가 우리 민족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우리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게 되었다.

대조영이 첫 도읍을 정했던 동모산(길림성 돈화)에서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를 거쳐 상경용천부가 수도가 된 뒤로 잠시 동경용원부로 옮겨간 9년을 제외한 162년간 상경용천부는 발해의 수도로서 눈부신 문명의 중심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장안성을 모델로 도성과 궁성을 건설하였다.

궁성의 크기는 당나라 장안성과 거의 비슷하였다. 외성의 크기는 상경성이 동서 4.6km, 남북 3.3km로 한 축의 길이가 장안성의 절반가량 되었다. 외성의 남문에서 궁성의 남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폭이 110m로서, 광화문 세종로의 폭이 100m인 걸 생각하면 발해인들의 생각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앉아 있는 5개의 궁전터를 가로지르며 푸른 잔디밭을 걷는 동안, "철수 형"은 발해 1300호를 타고서 동해바다를 질주하고 있었다. 성벽을 타고 넘은 바람이 잔디밭을 내달리자 "철수 형"의 눈빛이 푸른 빛으로 출렁거렸다. 사방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나의 작은 땅에 /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 젊은 우리 힘들이 모이면 /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우리가 서로 / 손을 잡은 것으로 큰 힘인데~~~".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였다.

저자 주. 사진은 상경용천부 궁성의 남문인 오봉루 위에서 바라본 주작대로의 모습.
지금은 20m로 좁혀졌지만, 원래의 폭은 110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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