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통영사연구회 이충실 연구원을 만나다
한산신문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후원 제4차 사별연수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기록문화가 현판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세병관 좌목에는 통제사를 비롯해 휘하 막료장수와 지휘관도 기록돼 있어 통제영의 중요한 기록유산으로 그 가치가 대단히 크다. 이는 통제사들의 지혜와 흔적의 역사는 민족의 유산이다”

한산신문은 지난 20일 통제영 세병관을 방문,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후원 제4차 사별연수를 진행했다.

이날은 통영사연구회 이충실 연구원을 만나 세병관 좌목에 기록된 통제사들의 숨어있는 이야기와 해설을 듣는 시간을 마련, 현장연수에 나섰다.

통제영은 삼도수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통제사의 본영으로 임진왜란이 한창이었던 1593년 8월에 창설, 1895년 7월에 폐영될 때까지 약 303년 동안 왜적을 방어해 온 조선수군 총본영이었다. 세병관은 삼도수군 통제영의 객사로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겨 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통영은 통제영이 설치된 이후 그와 관련한 많은 역사자료가 남아있다. 그중 삼도수군통제사들의 흔적들이 세병관에 남아있다.

이충실 연구원은 세병관 좌목에 기록된 글들을 모아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연구하고,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 현판 해설을 펴내는 등 해설사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세병관 좌목에 관심을 가지고 2012년부터 세병관을 수천 번 오르내리며 기판에 있는 글자를 해독해 보려고 노력했다. 우리 선조들의 기록문화가 현판에 담겨져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판독작업에 나서게 된 계기는 이렇게 중요한 통제영의 기록유산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채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통영에 있는 비석과 현판은 그 누가 와서 물어봐도 완벽히 해석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했다.

통제영이 폐영될 때까지 208대 통제사 194명이 약 303년 동안 부임했으나 그중 76여 명만이 임기 2년을 채우고, 그 외 통제사는 임기를 채우지 못했거나 초과한 통제사도 있었다.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현판과 비석은 선조들이 사료의 기록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다. 당시 수군들의 직책과 군사문화 등은 물론이고 정1품부터 종9품까지의 관리 2,289명의 직책, 성명, 거주지 등이 명확히 새겨져 있다.

이충실 연구원은 비석과 현판을 하나씩 살펴보며, 숨어있는 통제사들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는 통영에 남아있는 비석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슬픈 비석이라는 타루비(墮淚碑)를 소개했다. 떨어질 타(墮), 눈물 루(淚)자를 써서 ‘눈물을 떨어뜨리다’라는 뜻을 가진 타루비는 우리나라에 14개가 있다.

이 연구원은 “비석의 주인공은 140대 김영수 통제사로 부임한지 6개월 만에 순직했다. 비석은 순직 후 백성들이 세웠다. 내용을 살펴보면 ‘6개월 동안 이곳에 내려와 한마음으로 일하고 몸에 맞지 않는 옷 입어가며 말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계획한 일을 반도 하지 못하고 공은 어찌 이렇게 일찍 가셨나이까’라고 돼있다.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서로 탄식하면서 군사와 백성들이 조문했다고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비석들을 살펴보면 한자 하나에도 뜻을 알아야 해석을 할 수 있다. 글자 하나에도 뜻이 있기 때문에 해석 자체가 어렵다. 비석에는 오동나무 친(櫬)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상여가 나갈 때 나무판자를 오동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나온 글자다. 이를 해석하면 상여가 나가는 날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울면서 세운 비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제6대와 제9대 통제사를 역임한 이경준의 이야기도 흥미를 끌었다. 제6대 통제사 시절인 1604년 재임 시 왜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무장선 캄보디아 외교사절선이 태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해 통영의 당포에 표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캄보디아를 다녀오던 외교사절이 탄 이배는 1604년 6월 14일 악천후로 표류, 통영 당포에 이르렀고 출동한 조선수군은 교전 끝에 무장선원 20여 명을 죽이고 왜선을 제압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에서는 갑자기 실종돼 행방불명으로 남아있던 이 일본 무장선이 교전 후 중국으로 이송 조처된 사실이 약 400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지게 됐다.

왜인 31명, 중국인 16명, 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와 그를 따라온 흑인 2명 등 총 49명을 포로로 잡아 서울로 압송, 조사를 마친 다음 다시 명나라로 이송해 사후 처리를 넘겼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서양인은 네덜란드인 하멜이나 박연이 아닌 400년 전 통영에 표착한 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라임이 새로 밝혀지게 됐으며, 이는 한국사의 새 역사가 됐다.

이충실 연구원은 “이처럼 현판과 각종 비석 속에는 재미있는 옛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이런 이야기를 활용해 통영을 알린다면 관광객들이 재미를 느끼고 많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현판 속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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