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메인박스 칼럼
최광수의 통영이야기 229 - 충무공, 충무공을 만나다 1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에는 아홉 살 아래의 또 다른 이순신(李純信)이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함께 누볐고, 노량해전에서 눈을 감은 이순신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은 이도 이순신이었다. 이순신 덕분에 이순신은 이순신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제120화 이순신, 이순신을 만나다 참조).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는 또 다른 동명이인이 있었다. 그도 아홉 살 아래의 동생뻘이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진주대첩의 주인공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이었다. 조선 시대에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모두 9명이다. 고려 시대 3명의 충무공을 합치면 우리 역사에는 모두 12명의 충무공이 있었다.
 
두 충무공은 시호만이 아니라 비슷한 점이 많다. 이 충무공은 외가인 충남 아산에서 자랐고, 김 충무공은 아산과 가까운 천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둘 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대첩과 진주대첩의 역사적 의의는 컸다.
 
명량대첩에서 이 충무공은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격파하였고, 진주대첩에서 김 충무공은 3,800명의 병력으로 3만 명의 왜군을 막아내었다. 두 장수 모두 왜군의 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바다의 영웅 이 충무공과 육지의 영웅 김 충무공은 서로를 알고 있었을까? 만난 적은 있을까? 역사는 종종 우리의 상상 밖으로 뻗어 나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의 부대가 두만강을 넘어와 조선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 이순신, 김시민 두 젊은 장교의 이름이 등장한다. 각각 39세, 30세였다. 이순신은 종9품 권관이었고, 김시민의 직급은 분명치 않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공을 세운 두 사람은 나란히 진급하였다.
 
두 사람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 충무공이 종8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할 때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다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종9품)으로 좌천되었다. 전라좌수영 발포 수군만호(종4품)로 근무할 때, 직속 사령관인 전라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려고 하자 관청 물건을 내어줄 수 없다고 단박에 거절하기도 하였다.
 
김 충무공은 회의 석상에서 병조판서가, 군비 확충과 훈련 강화를 주장하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자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발로 밟아 부수어 버리고는 그날로 관직을 그만둘 정도로 불같은 성격이었다.
 
두 장군 모두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급자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 충무공은 정유재란 때 부산 앞바다로 출전할 것을 종용하는 선조와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다 삭탈관직당했다. 김 충무공은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상급자인 경상우병사 유승인이 수백의 패잔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오려 하였으나, 일사불란한 전투에 방해가 된다며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 충무공과 조선 수군으로 인해 7년 동아시아 전쟁의 역사가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경상우도의 중심인 진주에서 호남으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았던 진주성 전투가 있었기에 전라도의 곡창지대와 여수의 전라좌수영이 안전할 수 있었다.
 
저자주. 이야기는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한산신문  hannews@chol.com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