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통영문인협회 시화전(10.4.∼8.)에서

일반 시민적 의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시를 난해시라 한다. 현대시에서 난해시가 운명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이상의 「오감도」가 실리면서부터,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현대에까지 왕성하게 작가의 내부적 운명에서 비롯되어졌다고 보는 난해시는, 상상과 사건이 팽팽하게 필연적으로 어우러졌을 때, 그 시적 긴장은 그만의 화법이 되는 것이다. 이때의 사건은 현상적 경험이 찐하게 내재해 있을 때가 주목받는다.

추상적 묘사의 난해시는 시인의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 정서가 두드러져 상당히 낯설게 보이는 경향이 짙다. 이런 난해한 시적 모습은 독자들의 눈에서 겉핥기식이거나 아예 외면당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이 그만의 특출한 창작물을 형상화 해 낸다는 자부심은, 높이 칭송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프로 문학계의 통설이다. 난해시는 시인의 성향이고 취향이라고 인정하는 이유는, 새로운 시 패턴을 창조해 내는 이미지의 언어주술사이기 때문이다.

좋은 난해시는 거듭 읽고 관심가질 때 새로운 시적 영역을 음미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시다운 진면모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제공 받는다. 보통 난해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공감이나 이해하려고 들어서는 낭패를 당할 때가 많다. 이럴 때일수록 시어의 리듬이나 운율을 즐기라고 권유한다. 전체를 읽고 내용을 수용하는 수준에서 그 이미를 되새김질 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조극래 시인의 시 '구멍가게에 들러 골목을 사다'를 읽으면 제목부터 혼돈의 상태로 들어선다. 본문에 들어서는 "느티나무 아래서 골목을 펼쳐놓"다, "어미 근심을 팔고 있"다, "아직도 골목을 껴입는 고립"이 존재한다, "느티나무 그늘로 만든 목도리 두른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미지, "이제는 껴입기도 힘든 골목 한 벌"에 대한 시적 구절에 가서는, 좀체 접근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연결된 문장들을 애정 있게 토닥거리다 보면 어느 정도의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멍가게에 들러 골목을 사다

조극래

산촌을 걷다가,/네가 건넨 눈길이 어머니 오일장터에서/떨이하지 못한 서러움이었네

천식을 앓는 듯한 너는/느티나무 아래서 골목을 펼쳐놓고/담벼락에 그려진 아이들 웃음소리며/늙은 애비 술주정이며/어미 근심을 팔고 있었네

담팽이넝쿨 보풀을 만지작거리며/아직도 골목을 껴입는 고립이 있느냐고 물으면/느티나무 그늘로 만든 목도리 두른 사람들이/어쩌다가 들린다고 했네

네가 펼쳐놓은 좌판은 내 어릴 적 안부였네/안부가 뭉클하다는 건/오래 씹은 그리움이 입안에 덜쩍지게/고여 있는 것이었네/고향달을 핥아 먹으면서 하늘바라기가 된 나를/골목길 어귀 선 어머니/가만히 바라보고 계신 것 같았네

이제는 껴입기도 힘든 골목 한 벌 사서/산촌의 늑골을 빠져나오면/세상 눈칫밥과 쉰 김치에 이골이 난 나를/너는 멀리까지 내어다보고 있었네

위 시에서 '산촌'의 '골목'은 화자의 유년 시절로 흥미로웠던 곳으로 보인다. 더불어 과거의 '안부'에까지 진전되는데, '구멍가게'의 흥미로움이나 관심에까지 이른다. 흘러간 과거가 잠재해 있어 아리따운 정감을 더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유년의 뭉클한 '구멍가게'의 좌판은, "오래 씹은 그리움이 입안에 덜쩍지게/고여 있는" 과거 상이다. 그가 경험했던 예전의 마을은 이웃들로 흥청댔던 곳이다. "담벼락에 그려진 아이들"의 흔한 그림같이 '웃음소리'가 왁자했고, "늙은 애비 술주정"이 자주 거론 되던 곳이었다.

시의 본문 중에 "네가 건넨 눈길"은 현재의 '구멍가게'가 있는 곳이다. 그곳엔 "천식을 앓는 듯한" 주인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그의 어린 시절 화자가 애잔하게 경험했던, 그의 어머니의 '오일장터' 같이 "떨이하지 못한 서러움" 이 공존하는, 물건을 파는 행위에 있어 허탕 치기 일쑤인 '구멍가게'에 눈길이 닿는다. 여기에서 '구멍가게'와 '오일장터'는 물건을 판다는 점과 상행위가 한산하다는 점에서 동일화 되어 있다.

오늘의 '구멍가게'는, 오일장터에서 어머니의 남새 정도가 마저 팔리지 못한 그날의 아쉬움을 제공해주는, 동기이고 주요 이야깃거리가 된다. 그 이유는 골목과 연관된 "아직도 골목을 껴입는 고립" 즉, 썰렁함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다. 이 와중에도 '구멍가게'는 마을이나 마을을 들른 어쩌면 반가운 손님인, "느티나무 그늘로 만든 목도리 두른 사람들"이 간혹 등장을 하는 곳이기에 현재도 존재한다. 그로인해

"어머니 오일장터"가 클로즈업되어 뇌리에 떠오르는데, "떨이하지 못한 서러움"은 깊이 사무쳐온다. 유년의 담벼락 "담팽이넝쿨 보풀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는 시적 화두의 장소에서 "이제는 껴입기도 힘든" 고향의 골목인 "산촌의 늑골"을 지금 막 빠져 나오면서, 현재의 그를 되돌아본다. 세월은 혈기왕성한 시절을 넘겨버려 그를, "고향달을 핥아 먹으면서 하늘바라기가"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세상 눈칫밥과 쉰 김치에 이골이 난" 대상임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쯤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다시 영상화 되어 도드라지게 되는데, 그 예전의 어머님의 모습이 아슴푸레하게 등장하면서 의미를 가중시킨다. 그 과거에 골목을 빠져나가던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골목 바깥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날 "가만히 바라보고 계"시며 근심하시던 버팀목의 당신, "골목길 어귀 선 어머니"는 "멀리까지 내어다보고" 아들의 장래가 무사태평하도록 유념해 주시던 모정이, '구멍가게'를 통해 재생산되어지는 시로 풀이된다.

전체적으로 위 시는 '구멍가게'의 한산함과 "어머니 오일장터"에서의 서러움을 연관시켜 시적 화두를 이끌고 내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승을 떠난 어머님의 참사랑을 도드라지게 하며, 모자간의 끈을 끈끈하게 잇고 있는 것을 맛볼 수 있다. 이렇게 조극래 시인은 서술적인 시적 표현 보다, 낯선 시적 이미지 구성으로 색다른 시의 마력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일군의 프로 독자들을 들뜨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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