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욕지도 개척 131주년이다. 1860년대 후반부터 삼남 지방에 흉년이 거듭되면서 기아에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새로운 삶터를 찾아 바다 쪽으로 진출하였다. 고종 24년 1887년에 입도 허가가 내려지고,   1888년 1차로 7가구가 승인을 받아 섬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전부터 더 많은 사람이 섬 살이를 시작했다.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이긴 했으나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섬을 무인도로 만들어버리고, 바다로부터 삶을 격리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해상 왕국을 건설하고 동아시아 바다 일대를 삶의 무대로 휘돌았던 장보고의 청해진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이 땅은 바다로부터 멀어졌다. 사람들은 그저 해안가에서 해조류와 조개, 갑각류를 걷어 올리고, 가까운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올릴 뿐이었다.

오랜 인류 역사를 통틀어 바다는 다가가기엔 두려운 망망대해이거나, 육지와 멀지 않은 바다는 생계를 위한 공간이거나 다른 땅으로 이동하는 통로였다. 15세기 초반 명나라 정화 함대가 아시아를 벗어나 페르시아만과 동아프리카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바다를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부와 세를 과시하고 조공을 받으려는 목적에 그쳤고, 바다는 물길에 지나지 않았다.

15세기 후반, 16세기에 들어 세계의 바다는 교역과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유럽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성적인 식량과 토지 부족에 시달리던 유럽의 삶이 바다라는 신세계를 개척함으로써 연장, 확장되었다. 유럽 사람들이 일컫는 대항해의 시대, 대발견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바다를 전혀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게 된다.

육지를 감싸고 있는 주변부가 아니라, 다른 땅으로 가기 위한 이동로로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한 보조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 바다를 인식한 것이다. 모든 바다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신대륙의 발견보다 더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유럽 국가들의 세력 확대와 제국주의의 토대가 되었고, 전 세계에 걸쳐 경제, 기술, 문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바다가 새로운 영토로 인식되었지만, 인간과 바다의 관계는 인간이 육지와 맺었던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바다는 여전히 식량 생산을 위한 밭이었고, 자원채굴 기지였고, 교통로였다. 거기에 더해 인간이 바다에 새롭게 부여한 숙명은 쓰레기장이었다. 아무리 많은 쓰레기를 버려도 바다는 다 받아주었다.

대항해 시대가 유럽 사람들에게는 개척의 역사였지만, 세상 곳곳의 토착민들에게는 대학살의 역사이자 대파괴의 역사였듯, 새로운 세계로 등장한 바다 또한 수탈과 파괴의 대상이라는 가혹한 굴레에 얽매여야만 했다. 바다와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오던 이들도 서구 문명에 휩쓸리면서 파괴자의 길을 걸었다.

욕지도 개척은 수탈과 착취, 배고픔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질 좋은 진상품을 확보하기 위한 관리들의 도전이었다. 이제 욕지도 앞바다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육지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먹거리와 모래와 에너지를 퍼낼 것인가, 더욱 인간답게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것인가? 죽임과 파괴, 무지와 착취. 공존과 평화, 이해와 살림. 인간과 바다의 관계는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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