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님의 귀향

박경리 선생님에게 나는 고향의 대역이었다.

1960년대에 내가 재직하던 한국일보의 문화부장이 동향인의 작가를 만나러 가자고 하여 서울 정릉의 집으로 찾아가 처음 인사했을 때 박 선생님은 내가 통영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친지처럼 반가워했다. 통영을 무대로 한 '김약국의 딸들'이 나온 후였고 '토지'는 아직 착수하기 전이었다.

그 이후로 박 선생님과 친밀한 교분을 잇기 시작한 것은 내가 한국일보의 편집국장이던 때부터다. 그 무렵은 이미 원주로 이사하고 난 뒤여서 거의 해마다 원주의 집으로 찾아가면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는 법 없이 늘 집에 점심상을 손수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올 때는 넓은 텃밭에서 혼자 가꾼 채소들을 담뿍 차에 실어 주곤 했다.

박 선생님이 원주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오면 그것은 고향 생각이 났을 때였다. 박 선생님은 서울에서도 가까이 지낸 통영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사람을 가리는 편인 박 선생님이었지만 나에게는 고향 후배로 격의 없이 대해 주었다. 내가 '토지'에 등장하는 임이네를 생각하고 "박 선생님이 참 욕쟁이 이던데요"하고 슬그머니 장난말을 건네면 즐거운 듯이 크게 웃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이 설립될 때에는 나를 이사로 앉혔고 이사회 모임이 서울에서 열려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박 선생님이 나를 만나는 것은 고향을 만나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호의는 고향에 대한 호의였다. 갯사람에게는 언제나 몸에 소금 냄새가 묻어 있듯 통영 억양을 평생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서 언제나 고향 냄새를 맡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토착성이었다. 방랑하지 않았고 여행도 별로 즐기지 않았다. 원주라는 내륙에 넓은 마당을 가지고 정착한 것도 그 때문이고, '토지' 자체가 이 토착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토착성의 출처가 바로 고향에 대한 강한 애착이었다.

박 선생님은 외국 여행도 좋아하지 않았다. 일본을 미워해 한 번도 발을 디딘 적이 없다. 내가 일본을 두둔하기라도 하면 "김 선생, 친일파네요"하고 핀잔을 주었다. 일본뿐 아니라 누구나 가는 미국도 가 볼 생각을 안 했다. 중국은 다녀왔으나 그것은 문화적인 동향 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4년 '토지'를 완결하고 난 얼마 후 이 박 선생님이 뜻밖에도 나에게 가족과 함께 파리에 같이 가자고 했다. '토지' 제1부가 파리에서 프랑스어판으로 출간된 것을 계기로 출판사에서 위로 여행을 권해 신문사의 파리특파원이었던 내가 동행해 안내한다는 조건으로 승낙했다는 것이었다.

파리까지 오고 나서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돌아볼 욕심을 전혀 내지 않았다. 오로지 파리에만 체재하다가 밀레의 그림 '만종'의 현장인 시골 마을의 발비종에 당일 왕복으로 다녀왔을 때는 만족해했다.

대하소설 '토지'가 탈고되었을 때 한국일보 주필이던 나는 한국문학의 이 장거를 신문으로는 유일하게 사설로 표창했다. 나의 신문 기자 40년 축하연 때는 박 선생님이 몸소 꽃다발을 들고 와 격려해 주었다. 내 책 '돌아가는 배'가 나오자 한 권 보내드렸더니 다 읽고 나서 "나이브한 나르시시즘이네요"하고 즐겁게 꼬집어 주기도 했다.

20대 후반에 출향한 박 선생님에게 평생의 숙원은 귀향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박 선생님에게 통영에 같이 가자고 졸랐다. 그때마다 "'토지'가 끝나야지요"하고 얼버무렸다. '토지'가 완간되고 나서도 기미가 없어 내가 몇 번 "박 선생님, 이제는 통영에 다녀오셔야지요"하고 재촉을 하면 이번에는 "김 선생이 같이 가겠다면 가야지요"라고만 대답했다. 통영시에서도 꾸준히 간곡한 초청을 하고 있었다.

'토지'가 마무리된 지 꼭 10년 뒤인 2004년 마침내 통영을 다녀오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마산 MBC TV에서 박 선생님의 귀향을 맞아 특별 대담을 하는데 대담자로 박 선생님이 나를 지정했다고 알려 왔다. 나는 영광스러웠으나 불쑥 신문 기자적인 당돌한 질문들이 자칫 박 선생님을 난처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사양했다.

출발 전날 나는 원주로 내려갔고 통영에서는 진의장 시장이 원주로 마중을 왔다. 박 선생님은 피곤하다면서 저녁에 일찍 쉬었다. 50여 년 만의 귀향에 만감이 교차하는 상념들을 잠재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튿날 박 선생님 차에 동승했다. 박경리 문학의 출처는 고향 통영이다. 그 문학을 키워준 고향으로 대작가가 되어 금의환향하고 있었다.  

통영 땅의 처음으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차가 잠시 쉬었을 때 박 선생님은 한동안 석상처럼 묵묵히 서서 고향의 향기를 심호흡하고 있었다.

통영 시민들이 박 선생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나는 이것이 박 선생님 본인만큼이나 궁금했다.

귀향 보고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는 통영시민문화회관 앞의 널따란 계단에는 강연회에 온 천여 명의 시민들이 미리 나와 도열한 채 스페인 민요 '고향 생각'을 트럼펫 연주와 함께 합창하며 환호성의 갈채로 박 선생님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관 앞은 조용했다. 박 선생님의 귀향은 하나의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무대가 너무나 비드라마적이 아닌가.

그래도 강연장 안은 만석한 시민들의 환영의 열기로 가득했다.

박 선생님은 강연에서 "작가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는 없다. 문학은 그것을 정화시키는 과정이다"라는 뜻의 말을 했다. 이 한 마디 속에 일찍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와 늦게 고향을 찾아오게 된 이유가 집약되어 있었다.

통영에 체재한 동안 나는 박 선생님을 수행했다. 모교인 통영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공부도 잘 못하는 학생이었는데..."하며 씁스레 웃었다. 충렬사 인근의 생가 자리를 둘러보며 아버지와의 불화를 아프게 회상했다. 시장을 보고 싶다고 하여 찾아간 중앙시장에서 상인들이 금방 알아보며 너도나도 진심으로 반기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했다. 거기 진정으로 만나보고 싶었던 고향 사람들이 있었다.

박 선생님에게 고향은 말뚝이었고 굴레였다. 그 말뚝에 끌려 고향에 와서 고향 사람들의 대환영을 보고 비로소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박 선생님을 고향으로 안내하면서 그 동안 통영 사람의 대역이던 나의 역할도 끝났다.

이 첫 귀향에 감격한 박경리 선생님은 결국 마지막 정착지를 버리고 고향 땅에 영원히 귀향하여 안식하게 되었다. 고향은 기쁘다.

김성우(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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