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예술 DNA와 박경리 선생의 3대 보물

진의장 전 통영시장에게 듣는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기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 첫 번째 장>

30여 년 전 통영지도 스케치 한 장이 인연이 됐다.토지 3부 집필시절 원주 단구동 집에서 혼자 말씀이 "통영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공통의 분모가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박경리 선생은 하동세무서장으로 있던 저를 만나기 위해 하동으로 오셨고, 토지의 무대였던 하동 땅을 처음 밟으신다 하셨다. 그날 이후 위대한 스승을 모시게 된 행복을 누렸다고 자부한다.

처음 만나던 그날, 왜 통영에 오지 않으시냐고 물었을 때, 당신의 대답은 "내 딸 영주가 말하기를 엄마가 돌아가시게 되면 엄마의 모든 것이 통영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씀 하시면서 살아생전에는 고향땅을 찾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면서도 통영문화재단 설립 시 기금을 보내주셨고, 통영시장 당선 직후 전화를 드리자 너무나 좋아하셨다.

그리고 당신은 2004년 고향을 떠난 지 50여 년 만에 와 주셨고, "통영과 원주가 이리 가까운 줄 몰랐다"며 감격해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이듬해인 2005년 1월 5일 원주로 불러 통영에 묻히시겠다고 유언하셨다.

"통영은 통제영 400여 년의 역사 속에 도도히 흐르는 통영예술 DNA가 있다. 토지를 비롯 내 소설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통영이 나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다"며 "유품을 가져가되 그 중 재봉틀과 국어사전, 소목장 이 세 가지를 가장 소중히 간직해 달라"고 하셨다.

"재봉틀은 나의 생활이요, 국어사전은 나의 문학이요, 소목장은 나의 예술"이라고 하셨다. 이 3대 보물은 현재 원주 토지문화재단에서 보관 중이다. 

2009년 5월 5일 선생님이 폐암 치료를 거부, 하늘꽃밭으로 가셨다. 급하게 서울로 올라가서 고향으로 모시고 오기 위한 절차를 급하게 밟았다. 그토록 원하던 고향으로 모시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왜 자꾸 눈물이 흐르는 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내 조국, 이 땅의 산과 들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위대한 공기요, 물이요, 하늘이었다.

다행히 2008년 마지막 생일을 맞아 산양읍 양지농원 골짜기에서 만난 박경리 선생의 5년 선배인 정창훈 옹께서 환대했고, 그 인연으로 박경리 선생의 집필실 자리로 봐 두었던 곳이 떠올랐다.

정창훈 옹과 아들 정대곤 양지농원 대표가 선뜻 박경리 선생의 묘소로 땅을 희사하겠다고 했다. 사실은 부자가 별장자리로 아껴놓은 땅이었다.

작은 인연으로 시작, 통영으로 영원히 오신 것이 고맙고, 기념관과 묘소도 그렇게 마련됐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時間을 앓았을 것이다.
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肉體를 去勢 당하고
人生을 去勢 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眞實을 記錄하려 했는가


박경리 선생의 시 사마천(司馬遷)이다. 하늘만큼의 그리움은 절대 고독을 다스리고 두더지 같이 땅을 파며 창공의 비상을 본다. 사시는 동안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으면 이런 시 구절을 썼을까.

이제 살아생전 그토록 오고 싶어하셨던 고향 땅 통영으로 영원히 오신 지 11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독전소리 저렁저렁하던 한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뵈는 양지바른 곳, 선생님이 좋아했던 그곳은 노루와 사슴이 쉬었다 가는 좋은 땅, 평화로운 땅이다.

이제 통영은 박경리 선생의 토지 정신-이른바 생명사상과 자연사랑의 그 정신을 잇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묘소 옆 자연 가운데 유리상자 속 박경리 선생의 원고가 낮에는 새소리  벌레소리 함께 듣고, 밤에는 별빛 달빛 함께 보는 그런 아이디어를 한 번 내보자.

선생의 수예점이 있던 항남동 오거리 삼각지 잔디밭에도 선생의 원고를 읽을 수 있는 유리상자를 같이 만들어 보자. 통영의 또 다른 상징이자 기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고향 통영과 원주, 토지의 배경인 하동 모두 획일화된 행사보다는 제각각 색깔 있는 박경리 기념사업을 펼치자. 그것이 박경리 문학혼을 숨쉬게 하는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