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땅의 끝이다. 도도한 땅이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바다로 막혔다. 그래서 '바다의 땅'을 꿈꾸기도 한다. 통영은 바다의 끝이다. 시퍼런 물이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땅으로 막혔다. 땅의 끝과 바다의 끝이 뒤엉켜 출렁댄다. 그렇다고 다투지는 않는다. 땅 끝과 바다 끝이 하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영의 바다는 늘 잔잔하다.

'땅끝'. 이건 한반도에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 어디에서 출발하든 차로 서너 시간이면 동서남북 땅끝에 닿는다. 북쪽은 철책선에 막혀서, 동남서쪽은 바다에 막혀서 걸음을 멈추어야만 한다. 멈추지 않으려는 심장의 고동에 발걸음은 바닷가를 서성인다.

바로 그때 막힌 곳에서 뒤돌아서지 않고 걸음을 내디디면 발아래에 새길이 열린다. 바닷길이 걸음을 인도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걸음을 내디디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비밀의 길이다.

통영 사람들은 바다의 길을 태생적으로 안다. 태중에서부터 갯바람을 맞았고, 갯가에서 뛰놀며 바닷길을 건너온 얘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통영의 바다가 망망대해였다면 달랐겠지만, 이 섬 저 섬을 건너온 이야기는 사람들 가슴에 이야기를 심었다. 뭍에서 맡을 수 없는, 바다 너머의 냄새가 물씬 나는.

그렇다고 그냥 바다의 냄새는 아니었다. 섬을 건너오며 사람의 냄새가 뱄다. 섬의 냄새인지, 바다의 냄새인지, 아니면 사람의 냄새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낯설지만 편안했다. 그래서 설레었다. 바닷길은 두려움 대신 설렘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 가운데 섬이 있었다. 섬은 뭍이기도 하고, 바다이기도 했다. 동시에, 뭍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었다. 뭍에서 보면 뭍이 아니라 바다였고, 바다에서 보면 바다가 아니라 뭍이었다.

섬과 섬은 바다로 나아가는 전진기지이자, 동시에 바다 너머의 이야기가 흘러들어오는 수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안으로 밖으로 이야기와 삶이 흘러 다녔다.

섬이 없었다면 통영은 통영이 아니었다. 바다 이야기는 뭍에 닿지 못하고 물속으로 녹아 없어졌을 것이다. 570개의 보석 같은 섬들로 인해 통영은 통영일 수밖에 없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통영 사람들은 성 쌓기를 즐기지 않았다. 바다가 성이었고, 성은 쌓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였다.'

진취성과 모험심은 통영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거칠지 않은 진취성이었다. 저들과 같이 '바다의 땅'을 개척하고, 소유하고, 독점하고, 배타하는 모험심이 아니었다. 흐르는 모험심이었다.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이 삶에서 저 삶으로, 흐르는 것 자체가 목적인 모험이었다. 많이 쌓고, 많이 지배하는 자 대신 잘 흐르는 자가 존경받았다. 힘센 '현실파'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파'를 쉽게 알아보았다. (제135화. "아ㅡ파와 현실파, 명길과 상헌의 길" 참조)

누가 떠벌리지 않아도 아이들은 맑은 눈으로 이들을 따라 배웠다. 스스로 잘 흐르는 자로 자라났다. 기른 자는 따로 없었다. 흐르는 바다와 바닷길이 길렀다. 아이들은 여전히 잘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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