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향수필문학회(회장 유영희)는 지난 2019년 11월 28일 통영시 산양면 궁항마을 〈바다와 시인〉에서 『수향수필』 제 47호 출판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필자는 '초정 김상옥의 산문정신-전문성과 문학의 치열성'에 관해 주제 발표를 했다.

구체적으로, 인문계고등학교 국어1(문교부, 1975.2.20. 초판 박음, 1982.3.1. 펴냄, 166~172쪽.)에 수록되었던 산문 2편과 1980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산문 1편과 그 외 산문 2편을 통해서, 그간 알려져 왔던 초정 김상옥의 문학성 즉 시조·시·동시 외 산문의 영역까지를 접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의미에서든, 무릇 예쁘고 귀여운 여자에게는 그의 남편이나 애인이 되는 남성은 누구 할 것 없이 다 마음 든든한 시종무관(侍從武官)이 아닐 수 없다.

천 수백 년 전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에게도 밤낮 호위의 책임을 맡았던 시종무관이 있었고, 지난날 영국의 마아거리트 공주에게도 그 같은 시종무관이 있었다.

선덕여왕은 스스로도 너무나 슬기롭고, 또 밖으로도 너무나 의젓함이 내비치어 천하에 그를 감히 범할 자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딸린 시종무관은 한갓 제왕(帝王)의 위의를 갖추기 위한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마아거리트는 겨우 「공주」라는 그 신분에만 의지하고 살아 왔기 때문에, 허식은 허식일지라도 사실 그에겐 시종무관은 무관으로서 필요했다.

선덕여왕의 무관은 홀로 남몰래 가슴 죄는 짝사랑으로 밤낮 측근에 모셨건만, 영원히 도달한 수 없는 피안(彼岸)의 드높은 하늘처럼 여왕의 용상을 외로이 우러러만 보았다.

하지만, 마아거티트와 그의 무관은 누가 먼저 눈치 보였는지 모르지만, 한때 그들의 프러포우즈는 전세계를 뒤흔든 염문(艶聞)을 퍼뜨리고, 서로가 서로 달아올라 마침내 연애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허수아비를 예배(禮拜)하고 있는 영국 의회에서, 신변 호위를 맡은 하잘것없는 한낱「몸종」을 공주의「부군(夫君)」으로 받들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하여, 다시 한 번 세계의 눈과 귀를 모았다.

이에 양(洋)의 동서를 가릴 것 없이 젊은 남녀들은 날마다 전파를 타고 날아오는 뉴우스로 하여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나, 수천 수만의 순정의 기대를 휴지처럼 내동댕이치고, 마아거리트 공주는 드디어 암스트롱 죤스라는 엉뚱한 사진 작가에게 출가하고 말았다。

그들 서양 사람은 대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에겐 연애와 결혼이란 것이 한낱 의식화된 비즈니스요, 이해(利害)를 도모하는 방편이요, 또한 끓는 육신의 욕구를 태우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선덕여왕은 어찌 되었던가? 한 시종뿐 아니라, 위로 성골(聖骨). 진골(眞骨) 아래로 서민, 걸인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사랑하는 사나이가 구름 같았다.

하건만, 오직 그 중에서도 그에 대한 애끓는 연모로 하여 실성(失性)까지 하게 된 지귀(志鬼)란 걸인의 소식만이 아득히 천청(天聽)에 올라, 여왕은 지귀(志鬼)의 잠든 움막에까지 몸소 찾아가, 자기의 팔에 끼었던 순금 팔찌를 뽑아서 그의 가슴 위에 놔 주었다 한다.

만천하의 오연(傲然)한 여인들이여! 또 불우한 시종무관들이여! 이 얼마나 고귀한 낭만인가. 그리고, 또 이 얼마나 차원 높은 사랑의 전고(典故)인가. 다들 한번 가만히 헤아려 보시구로!(「시종무관(侍從武官)」)


이 산문이 수록된 『시와 도자』(김상옥, 아자방(亞字房), 1975.12.25.)는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 <묘(妙)한 일, 묘(妙)한 일>은 16편, 2부 <봄과 여인(女人)> 은 19편, 3부 금관(金冠)은 19편으로, 합이 54편이며 총 293쪽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서(自序)에 "시(詩)가 문자(文字) 예술에 가장 꽃다운 것이라면, 도자(陶磁)는 또한 조형(造形) 예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한다.

선덕여왕은 신라 27대(진골) 왕〔28대 진덕여왕,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이다. 26대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 맏딸(덕만)이 왕위를 계승했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통치했다.

두 명의 남자(용수, 용춘-진골출신)와 세 번 결혼했으나 아이는 낳지 못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을 막았고 내정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태평한 시대를 누리게 했다는 평을 받는다.

선덕은 자라며 "용봉(龍鳳)의 자태와 천일(天日)의 위의를 지녔다고 했다." 영험하고 성스러운 왕으로 또는 천성이 밝고 지혜로운 왕으로 불리었다.

위 산문은 선덕여왕을 짝사랑한 '지귀(志鬼)'의 아야기다. 『수이전』, 『삼국유사』 등에 전한다.

'지귀'는 선덕여왕의 미모에 반해 짝사랑으로 상사병을 얻을 정도였다. 이렇게 <나는 선덕여왕을 사랑한다>는 실성한 자, '지귀'의 떠도는 소문은 서라벌 성안에까지 퍼지게 된다.

어느날 선덕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려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절탑 밑에 여왕을 기다리다가 잠이든 '지귀'에게 다가가, 자신의 팔찌를 빼어놓고 왕궁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다. '지귀'는 팔찌로 인해 여왕이 다녀간 것으로 알고, 다시 사모의 정은 더욱 불타올라 마침내 죽어 화귀(火鬼)로 변했다는, 민속학적인 의의를 지닌 민간설화이다.

위 산문의 내용이 지니는 의의는, 신라의 선덕여왕에 영국의 마아거리트 여왕을 등장시켜 대비하고 있으며,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만인 평등사상으로, 신이나 자연만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인간성(humanity)만이 높고 귀히 여긴다고 믿는 실증주의적 인간성 숭배사상, 즉 인본주의(humanism)을 주창하는 내용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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