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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수의 통영이야기 242 - 오늘의 이순신 7, 역사를 보다
   

이순신에게 명은 어떤 나라였을까? 조선과 명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조선은 건국 초부터 명과 사대교린 관계를 맺으며 외교의 안정과 조공무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나름 성공한 외교였다. 하지만 이때 얻은 이득과 안정은 600여 년 동안 족쇄가 되었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신진 사대부들의 철학적 배경인 유학과 이들의 정치적 뒷배 역할을 했던 명에 대한 자발적 사대는 망국의 늪이 되었다. 실리를 바탕으로 명분을 앞세워야 하는 외교가 외눈박이가 되어버렸다.

이미 국운이 기운 명나라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급격히 국력을 소실하여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조선은 이를 외면했다. 조선의 외교는 신흥 강대국 청을 오랑캐 취급하며,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형제 관계에서 군신의 관계로 전락했다.

청이 몰락하고 일본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할 때도 새로운 국제 질서를 보지 못했고, 소 중화주의에 빠진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우왕좌왕하였다. 일본을 끌어들여 어설프게 개혁하려다 실패하고(갑신정변), 오히려 밑으로부터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외세를 끌어들여 학살하고 억압했다. 결과는 망국이었다.

이 모든 외교 실패의 바탕에는 역사의식의 부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 나라의 역사를 잊음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쉽사리 외세에 의탁하여 국익마저 내팽개쳐 버렸다. 지도자들의 몰 역사의식은 수많은 백성의 고통으로 귀결되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명나라 조정을 천조(天朝)로, 장수를 천장(天將)으로, 병사를 천병(天兵)으로, 사신을 천사(天使)라 불렀다. 서애 류성룡 조차 《징비록》에서 명나라를 부를 때 '천(天)'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달랐다.

천(天)이나 명(明) 대신 '당(唐)'이란 표현을 썼다. 천인(天人), 천장(天將)이 아니라 당인(唐人), 당장(唐將)이라 불렀다. "당나라 장수(唐將)의 통첩이 왔다. 내용이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당나라 군사(唐兵)에게 몰리어 달아났다고 하니, 그 거짓됨이 이루 말할 수 없다(1593년 7월 20일)."

"남해 현감이 보고한 내용에, 당나라 군사(唐兵) 2명과 왜놈 8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당나라 군사(唐兵)를 올려보낸다고 하였다. 가져다 살펴보았더니 당나라 도사부(唐都司府) 담종인의 금토패문(禁討牌文)이었다(1594년 3월 6일)."

당(唐)은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의 하나일 뿐, 천자의 나라가 아니었다. 당은 한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우방이 되어 힘을 합쳤지만, 결국엔 신라까지 지배하려 들었다가 7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나라였다. 그래서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아니라,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당나라를 패퇴시킨 676년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순신은 이런 역사를 꿰뚫고 있었다. "저녁 내내 홀로 수루 위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1596년 5월 25일)."

분명한 역사의식과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에, 명의 진린 도독을 적극적으로 회유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굴하게 굴종하지도, 거만하여 배척하지도 않았다. 강직한 이순신이 진린의 횡포에 맞서 갈등하다 전투에서 패배하리라던 우려는 이순신을 모르는 조정의 기우에 불과했다.

초강대국 미국과 신흥 강대국 중국이 갈등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지도자들과 장수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전에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가?

한산신문  han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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