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 소식 아득히 들을 길 없어
외로운 신하 시절을 한탄하네
소매 속엔 적을 꺾을 병법 있건만
가슴 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천지는 캄캄한데 갑옷에 서리 엉기고
산하에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태평 시절 돌아오면 말을 돌려보낸 뒤
의관 갖추고 숲속에 살리라

이순신 장군의 시구다. 임금을 향한 충성심도, 공명심을 버리고 무위자연하고픈 마음도, 적을 향한 자신감도 내비치지만, 그의 심중에 깊게 자리한 것은 백성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적을 이길 방법은 있어도 고통으로부터 백성을 구할 길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이기는 싸움에 집중했다. 칼을 쥔 장수가 백성을 구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뿐 이기에.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서도 이런 마음은 선명하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으니 나라가 부흥해야 할 시기에 소망하는 것들을 크게 잃고 있어서, 바다 한 모퉁이에 있는 외로운 신하로서는 북쪽을 바라보며 슬픔이 가득하여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아있습니다"

사랑에는 자심(慈心)과 비심(悲心)이 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이 자심이고, 상대의 고통을 함께하는 마음이 비심이다. 이 중에서 훨씬 깊고 큰 사랑은 비심이라 하였다. 이순신의 사랑은 비심이었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최고 지휘관의 눈은 마를 날이 없었다.

그의 비심은 한결같았다. "저녁에 큰비가 와서 밤새 지붕이 새어 마르지 않았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하는데 고생스러울까 매우 걱정이 되었다(1594년 5월 16일)." "옥과현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 찼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1597년 8월 5일)." 그의 비심은 때로 칼이 되었고, 병영의 군율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여도 만호와 흥양 현감이 와서 수영의 서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을 털어놓았다.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양정언과 수영 서리 강기경, 이득종, 박취 등에게 큰 벌을 주었다(1596년 2월 26일)."

애민(愛民)은 성군의 덕목 1번이기도 했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두 임금, 세종과 정조 대왕의 공통점도 애민에 기반한 선정이었다. 세종대왕은 관노에게 출산 전 한 달과 산후 100일 휴가를, 그 남편에게도 한 달 휴가를 주도록 했다. 가난으로 인해 혼인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했고,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도록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다.

정조대왕도 수원 화성을 건립하면서 백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벽을 쌓는 일로 말하자면 올해 쌓아도 될 일이고, 내년에 쌓아도 될 일이고, 십 년이 걸려서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도 안 되고, 이틀을 굶겨도 안 될 것이며, 한 달을 참고 지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드러난 정조의 마음 한 자락이다.

언행에서 애민하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일 뿐이다. 아니면 '월급쟁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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