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압도할 무기의 우수성과 잘 훈련된 병사들의 용맹함은 승리를 위한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게 작전일 것이다. 작전은 명석한 지휘관이 고심해서 결정하기도 하지만, 대게 휘하 장수들과 함께 피아의 전력과 전세를 판단해서 최적의 전략을 고르기 마련이다.

함께 모여서 대화하거나 논의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의(議), 논(論), 화(話), 담(談)이 있는데, 의(議)는 오늘날의 회의처럼 의사결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논(論)은 상대방과 논리를 세워서 각자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토론의 성격이다. 화(話)는 여러 사람이 특별한 목적의식이 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담(談)은 두 사람이 화톳불 앞에서 정겹게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기갑부대를 이끌었던 패튼 장군은, 팀워크를 중요시했지만 주로 자신이 주도하는 브리핑 형태의 회의를 했다. 맥아더 장군은 회의를 싫어해서 즉흥적인 토론을 중시했다. 반면에 나폴레옹은 회의를 매우 자주 했다. 전쟁·내무·재정 같은 각 분야 위원회 회의를 매주 진행했다. 이순신 장군과 종종 비교되는 넬슨 제독은 장교나 다른 함선의 함장들과 식사를 하면서 토론하기를 즐겼다.

이순신 장군은 식사나 술자리, 활터, 배 위, 운주당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회의와 토론, 대화를 가졌다. 한산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나서는 운주당에서 밤낮으로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하였으며, 심지어 병사들의 의견도 들었다. 최고 지휘관이 병사의 의견을 청해서 듣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에게 섣불리 자기 뜻을 들이밀지 않았다. 철저히 듣고 또 들으며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였다. 1592년 5월 1일부터 3일에 걸친 출전 회의 중 자신의 의견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토론으로 출전 명분을 만들고, 출전 반대 주장을 세밀하게 검토했다. 반대론자의 근거가 바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순신의 결정은 신중했다. 하지만 한번 결정되고 나면 망설임 없이 즉각 실행했다. 탈영병을 처형할 때 그의 결정은 칼날보다 무서웠다.

이순신은 가족과 지인, 조정의 고위 관료 등과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한 번에 3통 이상의 편지를 쓰는 게 다반사였다" "유상(류성룡), 참판 윤자신, 지사 윤우신, 도승지 심희수, 지사 이일, 안습지, 윤기헌에게 편지를 쓰고 전복으로 정(情)을 표하여 보냈다(1593년 9월 4일)"

백의종군 중에는 하루에 14통을 쓰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 종 경과 인을 한산도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최호), 경상수사(배설), 가리포첨사(이응표), 녹도만호(송여종), 여도만호(김인영), 사도첨사(황세득), 배동지(흥립), 김조방장(완), 거제현령(안위), 영등포만호(조계종), 남해현감(박대남), 하동현감(신진), 순천부사(우치적) 등에게 편지를 보냈다(1597년 6월 12일)"

군사와 백성들이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는 방법(개유, 開諭)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2차 당포, 당항포해전과 한산대첩에서 구출한 아이와 포로들을 불쌍히 여기며 관리에게 잘 보살피고 전쟁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개유(開諭)'했다. "옥과현 경계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 찼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말에서 내려서 사리를 알아듣도록 잘 타일렀다(1597년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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