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영, 통영이 가장 '잘 나가던' 때는 영·정조 시절이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군수산업에서 파생된 공예산업이 활황을 띠면서 경제가 튼실했다. 기후가 온화하고, 곳간이 넉넉하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도 영·정조 시절은 세종대왕 시기에 이은 두 번째 문예 부흥기였다. 전쟁 없이 나라 안팎이 안정된 가운데, 백성의 삶을 보듬는 선정이 펼쳐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비교적 평온했고, 문화와 예술,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정조가 승하한 1800년 이후 조선의 국력은 급속히 쇠락하면서 안팎의 소용돌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몇 번의 실기를 거치면서 급기야 망국의 통한을 겪게 된다. 그해 세계 인구는 10억 명을 돌파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초대 통령이 되어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최초로 천연두 백신이 개발되었고, 화학 전지가 발명되었다. 산업혁명의 기적 소리는 영국의 하늘을 울렸고, 세계의 바다는 무역과 자원 탈취를 위한 무역선과 함대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조선에도 갑갑한 유교 국가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북학파로 시작된 실학의 등장으로 한반도에도 관념과 형식을 벗어던진 실용주의가 움트고 있었다. 그러나 소중화주의에 빠진 사대부들은 완강히 시대 변화를 거부했고, 변화의 불씨에 기름을 대는 대신 수구의 불을 놓아 희망을 꺼버렸다. 실학파는 국가 경영의 틀 밖으로 밀려났고, 서학과 천주교는 분서갱유의 질곡으로 밀려들어 갔다.

역사에 if로 시작하는 "만약 그때 000 했더라면~" 하는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선택은 있었고, 결과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정조 때 연암 박지원 무리의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정약용 등의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조선의 주류가 되었더라면' 하는 가정을 쉬 놓지 못하는 건 미련일 뿐이다.

북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은 55세 때인 1792년부터 1797년까지(정조 16년~21년) 4년 7개월간 함양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펼쳐보지 못한 국가 개혁과 민생 구제의 꿈은 여전히 그의 두 주먹 안에 있었다. 제방 쌓기, 물레방아, 베틀 제작 등 이용후생 정신을 실천하며 백성 구호 정책을 넓게 펼쳐 백성들로부터 덕망이 높았다.

함양에서 통영은 400리 길이다.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거리이다. 조선 최고의 군사도시요, 물산이 풍부한 경제도시요, 풍광이 빼어나기로 이름난 해상도시이니 연암이 통영을 찾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새로운 세상과 만남을 그이만큼 절실하게 원했고, 처절하게 부딪혔고, 간절하게 글로 풀어낸 이가 조선 500년에 둘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으니, 지금부터 나누는 이야기는 꿈에 불과하다. 봄 바다 위를 스쳐 가는 아지랑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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