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늘 수더분하여 호감이 가던 성효근 노인을 찻집에서 우연히 만난 때가 있었다. 항상 두 손에 겸손을 모아 쥐는 것이 몸에 밴, 그분의 눈매에서는 자비가 흐르고 있었다. 당당한 권현망(멸치잡이) 어업 선주(船主)인데도 몸짓이나 걸음걸이나 말씨조차 가난했던 옛 어부의 모습이다. 얼핏 보아 백여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선주(船主) 다운 데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흔한 '사장님'이란 호칭이 그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분과 이런 저런 대화중에 약간 무게를 느껴지게 하는 구절도 있었다.

"요즘 어한기(漁閑期)라서 쉬고 있습니다. 사월 초파일(석가탄신일) 전에 전국에 있는 절(寺刹)이나 한 바퀴 돌아 볼 참입니다."

사찰이란 사찰은 다 찾아다니며 시주(施主)하는 것이 그분의 연례행사다.

그 분의 비워내기 삶은 시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주만으로 줄어들지 않으니까 이웃돕기에 열을 올렸다. 어장 부근의 공공시설비 지원까지 확대하여 보았다. 교량을 설치하고, 길을 넓히고, 학교시설을 증축하고, 심지어 면사무소 증축 까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나는 통영군청 예산을 담당하고 있을 때였는데, 낡고 비좁은 산양면 사무소 증축 예산을 지원해줘서 매우 고맙기도 했다.

그렇게 비워낼수록 더 빨리 채워지는 것을 체험 한다며, 이것이 무슨 요지경 속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요지경이 아니고 성실한 땀이고, 천복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끼니 해결을 위하여 철들 때부터 팔을 걷어야 했다.

밥 짓는 것부터 익혀, 일본인이 경영하는 권현망 어선의 화장(火匠)일을 맡았다. 거짓 없는 순한 눈매를 가진 부지런한 소년은 청년이 되면서 선주(船主)의 신망을 독차지하게 되었던 것.

팔뚝에 청년다운 힘줄이 생길 무렵,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에게 강제징용으로 끌려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조국광복을 맞았다. 36년간 온갖 것 착취하고 살던 일본인들은 모두들 자기들 나라로 쫓겨 가게 되었다. 그때, 그 선주는 권현망시설을 평소 신망이 두터웠던 청년에게 넘겨주고 떠났던 것이다. 그런 뜻밖의 횡재로 맨 밑바닥의 화장에서 선주의 자리로 오를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그는 한평생 사는 것이 꿈 속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누리는 부(富)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치수도 맞지 않는 화려한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그런 기분으로 살아간다. 분에 넘치는 포만감 때문에 비우지 않으면 오히려 거북살스럽단다. 자기 그릇에 담긴 복이 저절로 넘칠까 늘 두렵다. 넘치기 전에 스스로 비워야 안심이 된다. 넘치도록 욕심 부리다가 몽땅 엎질러질 것 같은 예감에 오히려 불안해하는 노인. 각박한 세정에 길들여진 안목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재산을 가졌다는 비슷한 나이의 어느 노익장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세상권력까지 휘어잡으려고 떠들썩하게 나서는 판국인데…. 그 성(成)노인과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한 부자인지는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부자의 기준에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던가. 가진 것을 비우지 못해 안달하는 부자 이상의 부자가 또 있을까 싶다.

인생 80을 바라보기까지 늘 비우며 살아온 삶. 그 분의 가슴에는 이른 봄 양지에 돋아난 풀꽃의 향기가 스며있었다. 이런 순박한 마음의 호수에는 백로를 거느린 노송(老松) 그늘이 내려 앉아 늘 고요했다. 그런 호수는 풍랑이 일어날 리 없다. 그 분과 마주하고 차를 들면 나도 편안한 세계로 끌려가는 듯했다. 그 순간은 잠시나마 내 마음도 무욕의 고요 속을 헤매게 되었던 기억이,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늘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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