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병영을 세운다. 왜적을 방비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곳이 한산도 해역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8월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3도의 수군을 통할하도록 한다. 수군의 전체 전력을 통수할 수 있어 작전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역병의 창궐이었다. 1593년부터 1594년 전반기까지 수많은 병사가 전염병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저항력 상실로 죽어갔다. 1594년 4월 현재 사망자 1,904명, 확진자 3,759명, 확진자도 대부분 사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 병력의 1/3가량을 잃게 되는 크나큰 시련이었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보내는 장계에서 이렇게 썼다. "오래도록 바다에 머물러서 굶주림과 추위에 견디기 어려운 데다가 전염병이 지난봄, 여름보다 심하게 번져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연달아 죽게 되니, 군졸의 수는 나날이 줄고 병력이 날로 약해지는 형편이라, 앞날의 일이 참으로 염려되는 것입니다(1593년 윤 11월 17일)."

문제는 결핍과 밀집이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배불리 먹지 못하니 면역력이 저하되고, 물이 부족하여 제대로 씻지 못하니 비위생적이었다. 좁은 함선 내에서 생활하다 보니 환기와 청결 유지가 어려웠고, 많은 군사가 한 곳에 모여서 생활하니 역병은 삽시간에 전체 병력에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이순신이 아끼던 조방장 어영담 장군까지 역병으로 사망했다.

갖가지 약을 써도 듣지 않자, 조정에 유능한 의원을 보내 달라고 요청도 하고, 여제(厲祭)를 지내 유행병으로 죽은 영혼들을 위로했지만, 역병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때 난중일기에는 전쟁과 역병, 식량부족으로 신음하는 병사들을 향한 깊은 탄식이 곳곳에 흐른다.

세균과 바이러스는 태곳적부터 사람들을 괴롭혔다. 중국 내몽골 퉁랴오시 하민망하 유적에서 5천 년 전의 대규모 마을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홍산문명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우리 직계 조상들의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집이 불에 탔고, 170여 구나 되는 사람의 뼈가 집안에서 발견되었다. 대부분 노약자의 것이었다.

전쟁이나 폭력의 흔적은 없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더구나 집안에는 토기나 고급 옥 제품도 그대로 있었다. 이 미스터리는 결국 페스트 계열의 전염병에 의한 대량 사망으로 밝혀졌다. 전염병의 창궐과 환경변화는 고대의 삶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랴오닝성 뉴허량 유적은 크기가 5천㎡에 달하는 거대한 신전을 만들 정도로 흥성했던 대규모 거주지였는데 약 5천 년 전 갑자기 사람들이 사라져버렸다. 이는 기후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밝혀졌다. 기온 저하로 식량자원이 부족해지자 집단 거주 시설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작은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저자주. 이야기는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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