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은 1780년 5월(정조 4년) 삼종형(팔촌)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사신으로 떠났다. 44세 때였다. 세상 견문을 익히기엔 그리 빠른 나이가 아니었지만, 조선 최고의 견문록이자 세계 최고의 '절대기문' 『열하일기』를 썼다.

당시에 고위급 수행단의 자제나 친인척이 사신단에 참가하여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 사신의 수행원 자격) 제도 덕택이었다. 이 제도를 통해 대륙을 밟아본 사람은 꽤 되지만 연암 같은 이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시대의 패러다임을 깨부수는 파격 속에, 한반도의 역사를 뒤바꿀 세기적 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이용후생 실사구시. 성인군자가 통치하는 이념적 국가 경영의 틀을 벗어나 실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생활 밀착형 정치, 신기술 개발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명나라를 대신해 조선이 소중화(小中華)가 되어 주자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가운데, 오랑캐라고 얕보았던, '북벌'의 대상이었던 청나라는 기술 개발과 사회 혁신에서 앞서나가고 있었다.

연암은 청나라에서 세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목격했고, 그 모든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조선에 돌아와 개혁을 부르짖었다. 젊은 시절부터 꿈꿔오던 이용후생,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했다.

그의 기록은, 정조 임금이 반성문을 써내라고 할 정도로 기문(奇文)이었다. 관료도 아닌 일개 서생이 쓴 책이 조선의 문벌 사회를 뒤흔들었다. 열하일기는 내용도 파격이었지만, 분량도 파격이었다. 5개월여의 기행을 26권의 책으로 엮어내었다. 우리가 잘 아는 호질, 허생전도 이 『열하일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연암은 이순신 장군을 닮아 기록 벌레였다. 이순신 장군이 전란 중에도 꼼꼼히 일기를 써서 전무후무한 전시일기를 남겼다면, 연암은 말을 타고 가면서까지 글을 적을 정도로 듣고 보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글로 담아 기행문을 펼쳤다.

연암이 통영을 찾은 것은 1795년(정조 19년),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그해 정조의 명에 의해 교서관에서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였으나, 시골 현감으로서는 이를 구해볼 방도가 없었다. 고맙게도 통영 충렬사에는 왕명에 의해 전서 한 질이 보관되었으니 절호의 기회였다.

더욱이 『이충무공전서』 발간을 총감독한 유득공은 연암이 좌장이었던 백탑파의 일원으로서 연암의 절친이자 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연암의 통영행은 이충무공을 만나고, 제자 유득공을 만나는 두 가지 뜻이 함께 담겨있었다.

하지만 연암은 통영에 도착하자마자 미륵산 정상에 올랐다. 통영 견문의 제1보는 풍광이었다. 국방도 좋고, 물산도 좋고, 장터도 좋지만, 통제영과 바다를 바라보는 그 자리야말로 연암이 제일 먼저 찾아야 할 곳이었다.

15년 전 청나라로 떠났던 장대한 여행의 첫머리, 압록강을 건너 요동반도로 가는 길에서 끝이 안 보이는 지평선을 보며 연암은 통곡하였다. 한반도 바깥세상과의 첫 대면이었다. 좁은 조선 땅에서 보지 못한, 끝이 안 보이는 거기서 목놓아 울고 싶었던 것은, 땅의 좁고 넓음이 아니라, 조정과 양반들이 틀어쥔 백성들의 갑갑한 삶이었다.

희끗희끗한 수염을 바람에 휘날리며 연암은 또다시 통곡하였다. "오호라, 내가 여기서 한번 울고 싶구나. 여기가 정말 울고 싶은 내 나라 내 바다로구나"

저자 주. 2월 29일자 제247화 "연암, 통영을 말하다 1"에 이어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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