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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룡 시인의 날마다 한 생각 - 한국의 '찰리 채플린' 연극배우 추송웅을 그리며

코미디나 판토마임 배우 중에서 한 사람을 꼽으라면 올드 팬들이 잊지 못하고 기억해 낼 사람은 아마도 미국 할리우드 무성영화 시절 최고의 코미디 스타 찰리 채플린일 것이다. 통렬한 사회비판과 슬픔의 정서가 가득 배어 있는 우스꽝스런 그의 코미디는 사실 마임극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토마임 기술을 익힌 채플린은 헐렁한 바지에 지팡이를 휘두르는 독특한 부랑자 인물을 연기해 전 세계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비견되는 배우로 첫손에 꼽으라면 단연 추송웅이 아닐까 한다. 그가 연기한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 그 하나만으로도 찰리 채플린과 동열에 서기에 손색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지금 뭣시라 쿠고 있노! 아이고 싸아캐라! 싸아캐! 내사마 놀라서 자빠지것네" KBS나 MBC, SBS TV 등에서 여과 없이 들려오던 추송웅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 추송웅의 입에서 나오던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 중에서도 투박하고 질박하기로 소문난 통고성(統固城) 지방의 말투를 듣던 그의 고향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으면서도 고성에 산다는 것이, 고성 사람이라는 것이 참으로 흐뭇해 오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랬다. 추송웅이라는 배우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의 대표작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 한 편을 통해서, 적어도 강원도 고성이 아닌 경남 고성이, 고성 말(언어)이 세상에 뚜렷하게 각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추송웅이 누구인지를 60~70대에 속한 사람들은 그를 단박에 기억을 해낼 것이나 그가 고성 출신의 불세출의 연극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성의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가 누구였던지를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추송웅은 1941년 9월 4일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 소재 광일초등학교(현 고성유치원)사택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추의수께서 그곳 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

그가 연극배우가 된 것은 신체적 결함을 이겨내기 위한 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산수 수업시간이 되면 추송웅은 안절부절못했다고 한다. 같은 반의 급우들은 소리내어 구구단을 외웠다. 2단에서 3단을 거쳐 4단, 드디어 4×8에 이르러 32라고 소리를 크게 내지르면서 급우들은 모두 추송웅을 향해 쳐다보았다. 추송웅이 사팔뜨기였기에 사팔은 삼십이라고 그를 놀려주려고 그랬던 것이다. 이것이 그에겐 큰 트라우마가 되어 산수를 멀리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중학시절에는 가출을 하게 된다. 가출 후 영화관에서 본 영화에 빠져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부산공고를 졸업하고 중앙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1963년 졸업한 그는 중앙대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극단 '민중극장'에 들어가 창립공연인 마르소 작, 김정옥 연출의 '달걀'에 출연해 연극배우로 데뷔하였다. 독특한 외모 탓에 그는 '경상도 꼬마(키가 작아서)'나 '조물주의 실패작(외모 때문에)'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묵묵히 연극 한 우물만 파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았다. 몸에 밴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던 그는 서울 말투를 익히기 위해 부단히 연습했을 것이다. 경상도 말씨+서울 말씨=이 두 개 조합의 특유한 음색을 지닌 추송웅은 잘난 얼굴로 유명배우의 반열에 올랐던 신성일이나 김진규, 최무룡 등과는 확연히 다르면서 그가 지닌 유니크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얼굴과 몸짓으로 그만이 지닌 독특한 희극적 연기술을 개발하여 소극풍의 추송웅 스타일을 확립했던 것도 땀과 눈물의 결과였을 것이다. 동료 배우와 결혼해 이미 세 아이까지 두었지만 그의 생활은 비참했다. 연극 배우 10년 동안 52편의 연극출연료 수입금 총액이 고작 10만8천600원이었다. 아내가 써준 한 달 최저생활비 2만7천750원을 받지 않고서는 연극에 출연하지 않기로 한다.  

배우생활 15년을 자축하는 의미로 준비한 것이 바로 '빨간 피이터의 고백'이다. 그는 6개월 동안 창경원의 원숭이 우리 앞에서 원숭이와 한 몸이 되다시피 몸짓과 습성을 소화한 후 아내의 곗돈 70여 만원으로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직접 기획·제작·연출· 연기· 분장· 장치까지 하여 총 482회 공연에 15만2천명의 관객이 찾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후속작 '우리들의 광대' 역시 총512회, 23만5천명이나 찾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나 자신의 몸을 혹사한 탓으로 1985년 12월 29일 새벽 4시, 배를 앓다가 경희대 부속병원에 입원한 후 패혈증과 심부전증으로 급사했다. 그가 '빨간 피이터의 고백'을 공연하는 동안 무대에서 먹은 바나나가 7백개, 포도가 5백근, 관객이 땀 닦으라고 던져준 손수건이 3백여 장이나 되었다.

한국 연극사에 독보적인 발자국을 남기고 훌훌 떠난 추숭웅에 대해 그를 낳아 기른 그의 고향에서는 마치 산마루에 구름이 걸렸다가 사라진 것처럼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추송웅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무신경이었으나 그동안 필자의 문제 제기와 고성군의 지원으로 고성문화원에서 추송웅을 기리는 추모전이 2020년 하반기에 거행될 것이며 향후 추송웅연극제도 개최되리라 기대해 본다. 변변한 연극배우 하나 배출하지 못한 거창에서 '거창국제연극제'가 개최되고 있음을 고성군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정해룡 시민기자  han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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