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경주 최부자집. 12대 400년에 걸쳐 만석지기 재산을 유지하면서 인심을 잃지 않고 재물은 어찌 써야 하며, 재물 가진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였다.

경주 최부자집은 원래 무인 집안이었다. 만석꾼의 시작을 이룬 최국선의 할아버지 정무공 최진립 장군(崔震立, 1568년~1636년)은 25세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언양, 영천성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4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무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장군의 용맹함은 명성이 자자하다.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에 은거해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騰淸正)를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서생포 전투에서 조총에 맞아 얼굴에 상처를 입었으나, 탄환을 빼고 곧바로 적진으로 돌격하였다고 한다.

많은 공을 세운 장군은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策錄)되었다. 전투 중에 조총 탄환을 맞아 다친 점을 비롯하여 최진립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닮은 점이 꽤 많다. 1630년(인조 8)에 경기수사가 되어 삼도수군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를 겸하였다.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은 1627년(인조 5) 경기지역 해안의 국방 강화를 위해 경기도·황해도·충청도 수군을 통할하도록 만들어졌다. 즉, 남서해안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서해안은 삼도수군통어영이 방비하도록 수군 지휘체계가 변화한 것이다. 양 진영의 경계에 있는 충청수영은 통제영과 통어영에 모두 편재되었다.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가면 생가인 충의당과 충의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인근에는 숙종 때 사액된 용산서원(龍山書院)과 신도비가 있다. 충의공원에는 장군의 기마상이 우뚝 솟아 기상을 드높이고 있다. 그런데 동상 한쪽 벽면에, 마지막 전투에서 장군과 함께 목숨을 바친 두 노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충의당에는 이들을 기리는 충노불망비(忠奴不忘碑)가 있고, 매년 정무공의 제일에 함께 제향(祭享)하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기 위해 달려간다. 경기도 용인 험천 전투에서 충청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 하며 말을 몰아 적진으로 달려갔다. 결국, 청나라 군사의 화살 수십 발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때 최진립 장군은 노비인 옥동과 기별 두 사람에게 "난 여기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싸우다 죽을 각오니, 너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목숨을 보전하도록 하라"고 했다. 두 노비는 "주인께서 충신(忠臣)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저희 또한 충노(忠奴)가 되지 못하리오."라며 끝까지 함께 하다 전사하였다.

최진립 장군의 향사에는 충성스러운 노비도 함께 제를 올리고 있는데,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에도 장군의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그토록 살리고자 했던 백성들의 넋을 함께 모시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최광수의 통영이야기 제55화 '장군의 유훈, 충렬사 향사'-2016년 3월 18일 자 참조).

호국보훈의 달 유월을 맞아 피땀으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지켜낸 모든 조상님의 은혜에 고개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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