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어에서 활을 가리키는 낱말은 비오스 bios였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앞 음절에 강세가 있으면 활이 되고, 뒤 음절에 강세가 있으면 '생명'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활이 생명을 뜻하는 말이지만, 하는 일은 죽음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렇다. 활은 생명인 동시에 죽음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물건이다.

활시위 안과 밖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삶과 죽음의 운명이 갈라진다. 팽팽한 시위의 떨림에서, 죽음은 삶을 위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삶의 기운이 솟구칠 때 죽음의 순간이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옴을 목격한다.

활은 이 땅에서 살았던 선인들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고대의 중국 한족들은 큰 활을 매고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이들(東夷)을 두려워했다. <최종병기 활>이라는 영화에서 보듯 우리 민족에게 활은 생명과 삶터를 지켜주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누구보다도 활을 아꼈고, 활쏘기 연습에 열심이었고, 전투에서 활을 잘 활용하였다. 활은 적의 생명을 '죽이는 일'과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동시에 하였다.

고구려 벽화 속 사냥 장면, 화살은 뾰족하지 않고 천으로 감싸 뭉툭하고 둥글다. 동물의 살을 뚫고 들어가 생명을 끊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말 등에 올라탄 궁사의 양 다리, 허리, 어깨, 팔뚝, 두 눈의 힘이 시위에 압축되었다가 허공을 가른다. 땅! 화살은 튕겨 나가고, 짐승은 기절한다. 피 흘리지 않고 제물을 얻었다. 삶은 죽음의 귀결이었고, 죽음의 고통은 작을수록 좋았다.

활과 활터가 일상으로부터 멀어진 지금,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화살이 과녁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망산 중턱에 자리한 열무정(閱武亭). 지난해 열무정이 허물어지고, 고층 전망대와 놀이동산이 들어설 뻔했다. 활이 생명을 끊을 일도, '마지막 병기'로서 생명을 살릴 일도 없기에 활터 하나쯤 없어진들 대수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충무공의 얼을 되새기며 통영시민을 위한 심신 수련의 장으로서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753년 영조 29년 제114대 구선행 통제사가 부임하여 남망산 중턱, 지금의 시민회관 자리에 남송정(南松亭)을 건립했다. 1962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이름을 열무정이라 고쳤다. 세 칸짜리 아담했던 목조건물이 2,000년에 이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새단장하였다.

남망산 언덕에서 활과 화살이 삶과 죽음의 변주를 연주하며 통영의 바다와 하늘을 팽팽하게 흔드는 동안, 바다 건너 '윤이상국제음악당'에서는 현이 울어댄다. 깊고 넓을 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울림에 바다와 하늘은 춤을 춘다. 희/로/애/락/ 그리고 생과 사.

첼로 현을 누르고 활을 질주하며 시대를 꿈꾸었던 윤이상. 매일매일 활을 놓으며 삶을 건져 올렸던 이순신. 그렇게 활과 현, 활과 화살은 삶을 일으키고, 역사의 파노라마를 흔들어대었다.

우륵의 가야금이 가야와 신라를 공명 시켜 삼국 대일통(大一統)의 서막을 연주하였듯, 공주섬과 통영항을 사이에 두고 활과 현이 서로의 소리를 휘감으며 새 시대를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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