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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룡 시인의 날마다 한 생각 - 고성, 고성인

고성이란 지명은 그 시원(始原)이 깊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때부터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1263년이나 되었다. 고성 그 이전에는 중국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은 고성의 최초 명칭이었을 것이다.

고성은 북쪽과 서쪽으로 대체로 높은 산들로 막혀 있고 동남으로는 남해 바다와 연해 있다. 산에 살다가 산이 시들해지면 언제든 산의 답답함을 풀고자 바다로 나가서 푸르디푸른 코발트블루의 물빛이 주는 아득한 것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그리움에 젖을 수 있다. 바닷가에 살다가 바다가 싫증이 날 때는 언제든 벽방산, 거류산, 구절산, 무량산, 금태산, 연화산, 무이산, 수태산, 향로봉 등지로 올라가서 발아래 먼지 묻은 세상을 향해 포호하고 마음에 켜켜이 쌓인 욕망의 때를 말끔히 씻어낼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 산은 바다를 그리워하고 바다는 높은 산정의 흰구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산과 바다가 함께 공존하고 있으니 어찌 넓은 들이 없겠는가. 산과 산이 만나 뻗어 내린 골짜기 곰탁곰탁 흙은 살찌고 찰져서 크고 작은 농경지가 펼쳐진 곳에 오곡백과가 영근다. 고성읍에 비교적 넓디넓은 고성평야가 있다. 흔히 고성사람들은 이곳을 ‘바닥 들판’이라고 불렀다. 토질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물 빠짐도 좋고 관개도 수월하여 매년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쌀은 밥맛이 좋아 옛부터 인근의 거제와 통영에서 쌀을 사고자 장날이면 줄지어 찾아왔다.

고성 앞 바다는 난류와 해류가 만나는 지점이다. 어종도 다양하지만 맛 또한 천하 일미다. 횟감으로 싱싱한 생선은 육질이 고소하고 쫄깃쫄깃하여 고성 삼천포에서 잡히는 고기를 제일로 쳤다. 통영과 거제의 고기를 다음으로 쳤고 부산에서 잡히는 고기를 그 다음으로 쳐주었다.

고성의 기후는 사람 살기에 좋고 농사짓기에도 알맞았다. 봄 여름 가을에는 그 계절에 필요한 햇볕과 바람과 비를 내려주었다. 겨울이면 다른 지역에 눈이 펑펑 쏟아져도 이곳에는 포근하고 따스해 눈 대신 비가 내린다.

고성인(固城人)의 성정(性情)도 이 날씨를 닮아서인지 좋으면 간(肝)이라도 빼주고 싶을 정도로 인정 많고 솔직 검박했다. 농경사회였기에 대체로 보수적이고 관료 지향적이었다. 보수적이란 오랜 세월 동안 가꾸어 온 전통의 가치를 지키려는 것으로 이것은 아름다운 덕목이었다. 유교문화가 성행하여 반상을 가리고 양반 상놈을 운운한 것도 이에서 연유했을 터이다. 웬만한 마을에는 서원이 있어 일찍 학문을 갈고 닦아 관료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많았다. 출세라는 관점에서 볼 때 농경사회에서 관료사회로 진입하거나 진출하는 것을 최상의 길이라 여겼다. 문학이니 미술이니 음악이니 하는 예술의 토양은 숨을 쉴 공간이 없어 점점 박토가 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인근의 외지인들은 곧잘 고성사람이 앉은 곳에는 풀이 나지 않는다고들 했다. 영악하고 모질다는 뜻일 것이나 다방면에서 특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고성인들이 다소 세련되지 못해 드세고 거칠어 남에게 꺾이지 않으려는 불굴의 강인한 기질로 인해 고성사람이 앉은 자리에 풀도 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앉은 자리의 풀을 태울 정도의 뜨거운 열정과 창조적인 사고로 매사에 뛰어난 고성인에 대한 일종의 부러움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한산신문  hannews@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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