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김상옥 시조문학상’ 수상자가 선정 발표되었다.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 수상자 우은숙 시조시인의 시편들을 들추어보며, 그는 시조의 기본유형에 관해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만의 자유로움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개화시조’ 이후로 시조의 기준형에 관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제기 된 바 있으나, 그러다가 우리나라 정서에 알맞은 고유의 정형시 시조형은 이렇게 한다 하고 고정시킨 바 있다.

이는 국정교과서 등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많은 학습을 받게 하였고, 이에 따라 대쪽 같게 정진해 오고 있는 시조시인들에 의해 정형성 시조의 맥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자에 들어 시조시인의 인구가 늘고 사고의 다변화와 시적 시상과 이미지의 확장으로, 다시금 일군의 시조시인들 측에서 창작이라는 명분아래 작은 틀에서 변용시키고자 유도하고 있는 점을, 여러 곳에서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탈 시조인 파형시조의 형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고유 정형시조는 자유시로의 영역으로 예속되어지지나 않나하는 우려를 하기도 한다. 유사한 예를 근거로 들자면, 기존의 ‘민요’가 퇴화되어져 자유시에 편성된 경우에서 잘 알 수 있다.

인터넷상에 우은숙의 시집 ‘그래요, 아무도 모를거예요’ 하고 검색을 하면 ‘마음아 천천히 걸어라’, ‘두 눈을 감으세요’, ‘동백꽃 보러 갔다가’(공정한 시인의 사회), ‘모서리’(순수와 통속 사이), ‘복수초’, ‘기억의 여자’, ‘혈서의 밤’(시인동네) 등에서 상당히 접할 수 있다. 이들 시조는 그의 시조집 중에서 이슈가 될 만한 작품으로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인터넷상에 공개 되어져서,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김상옥 시조문학상’ 수상자의 시조들이기에 필자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여러 편에서 지금까지 고정되어져오는 시조의 기본 유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중에 한 편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마음아 천천히 걸어라

사랑은 눈물을, 눈물은 사랑을/낮게낮게 두라는 말 하늘 끝에 매달고/천천히 다가가는 법 내 안에다 적는다.

좀처럼 서두르지않는 섬진강 강가에서/그리움의 세포마다 마음귀를 열어놓고/듣는다!//천천히천천히 걸어라, 마음아

위의 시조 ‘마음아 천천히 걸어라’는 인도어 ‘디레 디레 잘네 만느’(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에서 따왔다고 한다. 시상의 충실함을 따지기에 앞서 위 3행 2수의 연시조는, 앞에서 말한 우리나라 시조기본유형과 유사한 듯 같아도 구체적으로 들어서면, 상당히 여러모로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일이 열거를 거치지 않아도 중·고등학교과정을 지낸 분이면 ‘시조가 왜이래?’ 하는 감정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으리라. 경우야 어떻든 간에, 고정되어진 우리것 고유의 정형시 시조 기준형이 혁신을 일으켜 수정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응석을 부리고 정형시조의 틀을 깔아뭉개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겠다는 격이 아닐까 여겨 본다.

시조시인 개인이나 단체가 낯설게 새로움의 허울아래 ‘우리는 시조를 자유시 같이 보이게 쓰겠다’ 하는 그들만의 자유 유형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우리나라 ‘정형’의 시조는 마침내 ‘민요’의 처지와 같은 꼴로 전환 될 것임에 분명해진다. 이런 행위들이 모두 잠재워질 때 시조의 존재 당위성이야말로 한결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시조를 이렇게 생산하는지? 기준마저 파괴된 파형시조가 왜 존재하게 되는지는 차체하고, 시조작품을 생산해 내는 시조시인 자신들의 반성이 없고서는 ‘시조’의 존재를 붙들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정격으로 충분히 잘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굳이 파형으로 고집하는 이유는 왜일까.

‘김상옥 시조문학상’ 수상자 범주에 파형시조를 이슈화 하는 것은, 김상옥 선생을 모욕되게 하는 경우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필자는 ‘김상옥 현대시조의 기본 유형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생전에 김상옥 선생이 열망했던 우리나라 ‘시조’ 유형의 작법형식에 합당하다고 판단해서 분석해 둔 것이다. ‘김상옥 시조문학상’의 초심이나 종심 심사위원의 탓을 다루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통영시문학상운영위원회의 책임자인 강수성 위원장이나 주최 측인 통영시 문화예술과의 운영결과가 이렇다는 것에 서글픔을 표하는 바이다.

시민의 혈세 1천만 원+α는 적은 예산이 아니다. ‘김상옥 시조문학상’ 만큼은 선생의 시업을 위해서‘ 전편에 걸쳐 정격시조를 꼭 유지해야한다는 뜻을, 김상옥 선생의 시학(詩學)과 예술론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의 주장 하는 것이다. 형식이 통일되지 않는다. 고로 정격시조는 아웃이다. 마침내 시조는 자유시화 된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시조시인들은 허다하다. ‘김상옥 (정격)시조문학상’이 아니라 ‘김상옥 (파형)시조문학상’으로 변질 되어져가는 현실을 눈앞에서 대하면서 허전하다. 김상옥 선생이 생전에 개탄했던 ‘파형시조’가 이렇게 덧칠해지는 오늘을 보며, 그래도 올곧은 시조시인들은 아직도 완고하게 찬란한 정격시조자리를 지키고 내실을 다져 창작에 심혈을 더함에 찬사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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