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학창 시절의 어느 날, 절친의 손에 이끌려 부산 서면 석빙고에 앉았다. 친구는 싱글벙글하고 있었고, 나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친구가 보여준 사진 속 여학생은 딱 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기다려도 여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는 사촌 여동생이 결코 그럴 애가 아닌데 하며, 기다림을 연장해 갔다. 일어나고 싶은 마음은 내가 더 없었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빵을 두 접시, 석빙고를 여러 개 먹어 치웠다. 빵은 맛있었고, 석빙고는 시원했다.

여고생, 여중생들이 진을 치고, 남학생들이 기웃대던 빵집이 통영엔 몇 군데나 있었을까? 세월 따라 기억은 제각각이겠지만, 칠성당, 고려당, 평화당, 거북당, 신생당, 만복제과, 영미당, 오미사, 하니타운, 123빵집 등의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그중에 제일 맛있었던 빵집은 어느 곳이었을까? 정답은, 마음에 쏙 드는 짝이랑 마주 앉아 먹었던 빵집일 것이다.

적십자병원 맞은편 복음신협 자리에 있었던 칠성당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곳의 핫픽인 도넛을 먹으려 미팅 장소를 칠성당으로 정하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설탕 넣은 따뜻한 우유와 함께 먹는 도넛은 청춘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도 남았으리라. 선보러 간 누나가 싸 오는 빵과 양과자를 맛있게 먹으면서 정작 자형 될 사람은 관심도 없었던 추억을 꺼내놓은 이도 있다.

데파트 앞 신발가게 자리에 있었던 거북당은 애플파이가 특히 맛있었는데 가난한 여학생들이 애플파이 한 개를 시켜놓고 친구들과 나눠 먹기도 했다. 항남동 옛 고려병원 위쪽에 있었던 신생당, 신생당 맞은 편에 있었던 하니타운, 아름다운가게 자리에 있었던 영미당, 우리은행 건너편에 있었던 백운당, 항남동 옛 자리를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오미사, 중앙시장 입구 옛 경남은행 자리에 있었던 만복제과, 단팥죽으로 유명했던 서호동 123빵집, 밀크쉐이크가 맛있었던 고려당, 오거리 시계탑 옆 다이소 자리에 있었던 평화당. 통영 사람들의 입맛과 향수를 자극하는 이름들이다.

대전에는 성심당, 군산에는 이성당 같은 전통을 지켜오는 빵집이 있어 지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군산과 비슷한 근대사 배경을 가진 통영에는 그런 빵집이 없는 게 아쉽다. 서양의 근대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점에서 서울과 어깨를 겨루었던 통영은 분명 빵 맛도 남달랐을 것이다.

다행히도 사라져가던 통영 꿀빵의 명맥을 이어, 지역을 대표하는 먹거리 브랜드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오미사꿀빵이 있다. 오미사라는 이름의 유래와 담백한 맛을 담은 스토리가 남녀노소에게 여전히 매력적이다. 아쉬운 건 맛도 가격도 좋은데, 종류가 하나뿐이고, 비슷한 꿀빵집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전통의 빵 맛을 이어가고 있는 가게들도 있을 텐데 옛 정취 어린 이름들이 사라져버려 시민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빵에 얽힌 추억 또 하나. 부산 금정산성 야유회 날, 새내기 대학생들은 풀밭에 앉아 낱말 놀이를 했다. '이것을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네 저는 빵 속에 넣어서 먹겠습니다.' 이쁜 내 친구는 그날부터 별명이 '빵순이'가 되었다. 오죽 빵을 좋아했으면, 바퀴벌레까지 빵에 넣어서 먹으려고 했을까.

달콤한 제과점 빵을 먹을 때면, 사진 속의 여학생과 이쁜 내 친구와 사라져간 빵집 간판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정작 궁금한 건 여학생들의 안부가 아니라, 빵에 들어간 재료의 건강이 아니라, 지금 내 앞의 이 빵을 구운 이들이다. 어떤 마음으로 이 빵을 만들었는지, 그는/그녀는 빵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을 반죽에 어떻게 버무려 넣는지 그게 궁금하다.

저자 주. 달고 고소한 빵집 추억을 나누어 주신 김순효, 김미선, 박정욱, 정숙희, 조경웅, 최재준, 이보래화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추억을 모아서 쓴 글이라 빵집에 관한 정보가 실제와 다소 다를 수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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