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한 시인, 늘샘 탁상수 시인연구 완성…일제강점기 절필 저항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의 선구자… 한국근대 시조문학사의 시조

▲ 지난해 최초 공개된 늘샘 탁상수 사진.
한국근대문학사상 최초의 시조 동인지 '참새'를 발간,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늘샘 탁상수(1896-1943·항남동 67번지·초정생가 64번지 바로 근처)의 연보가 드디어 완성됐다.

또 생몰 연대조차 불명확했던 늘샘 탁상수 시조시인의 시와 시조, 민요, 동요, 수필 등을 종합한 총 170개에 달하는 작품 목록을 작성,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늘샘은 1920∼30년대 그 유명세가 대단 했으나 일찍이 운명한 까닭으로 현대에 잊혀져가는 통영의 문사다.

해방되기 두해 전까지 통영에 살면서 동랑 유치진, 청마 유치환의 대선배로서 문단에서 활동한 업적은 물론 하보 장응두와 초정 김상옥에 이르기까지 시조문학의 대를 잇게 한 주인공이다.

하지만 경남 문학사나 인물사전에도 포함돼 있지 않다.

이는 중간에 석내(碩乃)라는 개명과 늘샘, 와룡, 와룡선인 등 다양한 필명의 사용, 그리고 사고로 인한 돌연 사망 등 후학들의 연구에 다양한 애로가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에도 한산신문 칼럼리스트인 김보한(시전문지 시계 발행인) 시인이 지난 10년간 늘샘 탁상수를 연구, 그동안 120편이 넘는 시와 시조, 산문을 유명 문예지와 신문 등에서 수집하고 연구해 냈다. 

지난해에는 유족의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늘샘 탁상수와 하보 장응두 시인 연구-인생 관련 증언 및 발표작품들에 관하여'를 발표, 늘샘 탁상수의 생몰 일대기를 완성해 냈다.

올해는 이 연구에서 더욱 발전, 시전문 계간지 시계 통권 13호를 통해 늘샘 탁상수 시인 연구 시리즈 3을 완성해 냈다.

특히 한산신문 기사 등을 근거로 늘샘의 동아일보 통영기자 시절과 통영신간회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그리고 당대의 문인이었던 최천과 진산 이찬근, 황산 고두동, 초정 김상옥, 청마 유치환 등과의 활동에 관한 자세한 연구 성과가 나왔다. 

이는 통영의 시조계보를 늘샘 탁상수-하보 장응두-초정 김상옥으로 온전히 복원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늘샘 탁상수가 문학작품을 맨 처음 발표한 해는 1925년.

당시 경남 도내 인구수 1위인 통영은 어업과 교역이라는 왕성한 경제력과 통제영 본산의 기질로 타지에서 꽃피울 수 없는 각종 문화가 뿌리를 내린 때이다.  

그 예로 그때 최초의 시조동인지인 '참새'지가 발간되었다는 것과, 동아일보 통영지국을 둘 정도로 경제가 안정적이었다는 것.

일부 문학인들의 관심이 통영에 있어 동아일보 등에 통영 제승당이나 통영지역을 배경으로 시조작품들을 심심찮게 발표시킨 점 등이 당시 상황을 일부라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늘샘 탁상수의 초기 발표작품 중 통영 지역과 연관성 깊은 시조가 동아일보 등에 발표된 점은 예사로 여길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1930년대엔 통영에 영화사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고, 비중 있는 동인지 성격의 문예지도 이 시대 태동하게 된다. 그때의 문화부흥 실정을 가히 어림잡고도 남음이 있겠다.

늘샘은 1921년 12월 31일 오후 1시 50분에 일본 동경 역에 첫발을 디딘다. 목적은 일본에서의 유학이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을 수학한 늘샘이 귀국한 1925년 여러 誌 또는 紙에 문학작품을 발표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7년 3월 27일엔 동아일보 통영기자로 임용 된다. 다음해인 1928년 10월 9일엔 다시 통영기자로 임용되는데 그가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한 행적으로서 유일한 부분이다.

당시, 동아일보 통영지국장엔 이찬근, 김두옥, 최천 등이 거론되고 있고 이들은 상당히 진보 성향의 인사들로서 일제의 요 감시 인물들 이었다.

지국장은 돌아가면서 번갈아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고, 그가 투병 중에 쓴 시들로 인해 2회에 걸쳐 임용,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으리라 여겨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시조 동인지 참새는 1926년 8월에 창간, 다음해까지 총 4집으로 발간됐다. 전권에는 시조가 주류가 이루는 데 총 384수 262편이나 된다.

▲ 탁상수 연구에 10년째 매진 중인 김보한 시인.
여기에는 유치진, 유치환 형제의 습작물도 포함돼 있다.

참새는 통권 4호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구한말 사라졌던 근대 시조 부흥이 주앙문단에서 채 일기도 전에 통영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시조문학 운동을 펼쳐 범 영남권으로 확산시키는 등 시조부흥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참새 동인지 종간 이후 그 당시 경남지역 문예지인 '시단'과 '토성' '소제부'와 우리나라 신시 개혁에 크게 공헌한 '생리'가 통영인에 의해 발간되거나 주축이 됐다.

아쉽게도 1935년 시조 '人生三重吟''옥려봉에서'조선문단 이후 지면발표를 중단하고 이후의 문학적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서 거화동맹과 정화회, 그리고 신간회 활동 등을 통해 무정부주의자로 저항정신을 실천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늘샘의 심적 이념성은 민족 해방만이 최우선의 과제이었던 것 같고, 통영을 넘어 지역 최초의 투철한 아나키스트적인 삶을 표방하였다고 결론 지울 수 있다.

경남 지역 동인지 연구에 앞장서고 있는 경남대 송창우 박사는 "늘샘은 한국 최초의 근대시조 동인지인 참새 발행인이자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을 이끈 이로 당대 최고의 시조문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자료가 빈약, 연보조차 없었던 문인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늘샘이 중앙문단이 아닌 통영에서 시조부흥운동을 시작, 현재 시조문단에서 통영을 비롯 경남문단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번 연구는 근대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일"이라고 평했다.

부산대 김정자 명예교수 역시 "한국 시조부흥운동 하면 늘샘의 참새지다. 시와 시조, 민요조 등에 두각을 나타낸 늘샘의 작품들이 정리되고 공개된 것은 참 반가운 일. 앞으로도 계속 연구할 가치가 높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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