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통영에서 빛과 거름이 된 두 거장김용주, 이중섭 화백의 삶

지난 10월 14일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1910-1959)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화비 건립 추진위원회(추진위원장 통영미협 최규태 지부장, 집행위원장 경남미협 서유승 회장)를 결성하고, 화비 건립에 첫 발을 힘차게 내딛었다.

이날 유족대표로 선생의 따님인 김봉순 여사와 김설 교수가 참석, 뜨거운 눈물로 통영시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이날 회자됐던 또 한사람, 바로 김용주 화백의 애제자 서양화가 박종석 선생의 이름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김용주 화백의 집을 제일 많이 오고 간 제자, 선생의 뜻을 가장 잘 안 제자, 선생의 화비 건립이 인생의 숙원 사업인 제자….
그 제자인 박종석 선생을 통해 통영에서의 김용주 화백의 삶과 또 김 화백이 후원한 이중섭 화백의 통영에서의 삶을 직접 들어보는 시간을 한산신문이 지면을 통해 마련했다. 【편집자 주】

 
김용주 선생께서 일본 동경에서 미술수업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작품들이 통영집(항남동 9번지) 자택 사랑채에 가득 쌓여 있었다.
몇 일 동안 선생님과 먼지를 털고 정리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 많은 세계 명화 원색도판과 미술자료, 물감 등 지금 생각해보니 유학시절 자신의 예술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가지고 온 캔버스는 주로 20호에서 100호로 거의가 대작이었다. 주로 인체(나부) 그림이 많았고, 누드 작품은 가위로 해체하여 4-10호 소품제작에 사용했다. 그렇게 소품을 제작하여 통영여중 재임 당시 두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내 기억에 <해바라기>, <옥잠화>, <백합>, <먼 길>, <언덕 위에 붉은 집>, <인물>, <가을풍경>, <미륵산이 보이는 풍경>, <어린 오리>, <병아리>, <전망> 등 정말 주옥같은 작품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김용주 선생님의 회화적 감성을 잊지 못한다. 그 때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통영 유지 분들께서 소장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산양면 김용주 농가에 나타난 이중섭

선생님이 산양면 농가(산양초교 부근)에 계실 때는 하루 두 번 있는 버스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농가까지 걸어서 가곤 했었다. 어느 날 가을 농가 집에 손님이 오셨는데 선생님께서 대단히 기뻐하셨다.

기섭아! 중섭아! 박포수! 서로 얼싸안고 좋아하셨다.

나전칠기 양성소에서 자주 뵌 이중섭씨가 왔었다.

중섭 선생님이 제게 "자네 여기 어떻게 왔나?" 하고 물으셨다.

용주선생님께서는 "토요일, 일요일 내가 농가에 있으면 문화동에서 여기까지 그림 공부하러 걸어서 온다네" 라고 하셨다.

그 후 아버지 심부름으로 칠공회사(당시 부친께서 나전칠기 공방을 하셨다)에 가면 이중섭 선생님께서 나의 머리를 만지면서 "좋은 선생님 만나 좋겠다." 하고 웃으셨다.

우리 집은 통영국민학교 뒤편 문화동 16번지이고 나전칠기 양성소는 세병관 앞이고 보니 토요일, 일요일이면 자주 이중섭 선생님께서 사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옆에 앉아 김용주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들은 나의 멘토였다. 그분들과 함께 꿈을 키워갔던 그 시절이 그립다.

953년 가을 통영 중앙동 성립다방에서 이중섭씨 개인전을 가졌다.

김용주 선생님께서는 분주했었다.

김기섭 시장님의 도움을 받아 통영 유지 분들께서 성림다방에 모여 한 바탕 다방이 떠나갈 것 같은 호탕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김기섭 시장님의 예술인 사랑은 대단했었다.

이정규, 김춘수, 황화구, 김용재, 수천당원장님, 명지병원원장님, 김상옥 씨 등등 여러 유지님들이 모여 전시장은 웃음 바다였다.

지금 생각하면 선배들께서는 어려운 때에도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었다.

미술, 음악, 문학, 무용, 공예, 모든 예술 면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똘똘 뭉친 우리 고향의 예향 그 때가 정말 부럽다.

문화동 나전칠기 양성소가 항남동 유영사진관 앞 누각자리로 이전하면서 공예학원으로 개명되었고, 이중섭 선생님도 그 건물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중섭 선생님은 공예학원 뒷 골목길 샘이 집에서 다다미방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려 주인할머니께 야단맞았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정신 착란 초기가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얼굴에 기다란 코만 보인다고 했으니까.

김용주 선생님께서는 중섭 선생님께 물감, 캔버스 등 미술재료들을 많이 나누어 주곤 하셨다.

당시 유화 물감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많이 사용되는 흰색은 구할 수 없어 아연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였고, 캔버스는 종이나, 화판, 돛배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용주 선생은 일본에서 귀국할 때 미술재료를 많이 가지고 오셨으므로 작고하실 때까지 재료 구입은 별도로 안하셨다. 

김용주 선생은 사모님께 부탁해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이중섭 선생한테 자주 보내기도 했다.

당시 동원여관(우체국, 보건약국 부근) 방에서  가족 없이 홀로 작업하고 계시는  이중섭 선생에게  김용 주선생은 처음에는 사모님께 부탁해서 부식이나 된장, 간장, 김치등 반찬들을  만들어 보냈으나  이선생의  통영에서 머무는 기간이 차츰 길어지자 꽤 먼 산양면 용주선생 농장에서 통영시내까지 들고 다니기에는 멀고 무거워서 농장 일꾼(머슴)에게 소 달구지에  쌀과 부식를  자주  날라 주었다고 부인 이경연 여사는 기억하고 계셨다.

이중섭 화백께서 문화동 나전칠기 양성소에 기거할 때 통영 국민학교 주변에서 자주 사생을 하였다.

통영을 떠날 때 그 동안의 생활비와 약값 등 지원을 아끼지 않은 김기섭 시장님께 고마움의 표시로 그 유명한 '흰 소' 그림을 선물로 드렸다.

내가 1962년 미공보관(서울 중앙공보관) 1층에서 개최한 제 1회 한국현대작가유작전(제1회 한국현대미술가 유작전)에 김기섭 시장에게 위탁받아

출품, 세상에 공개되었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담뱃갑 은종이 그림은 대부분 통영에서 제작 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 화백께서 통영을 떠난 후 공예학원 후임으로 장윤성 선생(통영여중 미술 강사, 부인 김희조 통영여고 음악 강사)께서 이화백이 남겨 놓은 유품을 수집, 보존하고 있었다.

항남동 공예학원이 문화동 옛 통영여고 건물로 이전 한 후 장윤성 선생께서 부산안식교 재단 직업 연구소로 떠나면서 이중섭 선생의 스케치북 1권을 본인에게 주었다. 그 스케치북은 은종이 그림을 제작할 때 받침으로 사용하여 표지 양면에 골필 자국이 온통 동화(童畵)로 양면 모두 겹쳐 그려져 있었다. 이중섭 선생의 작품제작과정을 잘 알 수 있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스케치북 속지는 딱 두 장으로 한 페이지는 남자 손과 여자 손 사이에 매화꽃 한 송이를 연필로 스케치 하였고, 또 한 장은 선박의 돛대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낱장 32절지에는 인체가 로봇처럼 추상으로 수채물감으로 그려져 있었다.

1963년 제2회 한산대첩 때 선배 서양화가 유택열씨(작고, 진해 흑백다방경영)가 어린 내게 좀 빌려보자고 사정사정하여 빌려주었고, 돌려 받으러 몇 번이나 찾아 갔었는데 지금까지 돌려받지 못했다. 귀중한 자료로 유족들이 잘 보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용주의 예술 세계

나는 작고하신 박득순, 김 원, 이종무 화백이 살아 계셨을 때 해마다 봄, 가을 사생을 위해 제주도에 갔다. 따스한 봄날 성산포 앞 유채밭을 사생하고 준비한 도시락을 먹으면서 김용주 선생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박득순 화백이 동경예술대학 학업 중 조선 사람이 '가와바다 미술연구소' 사감으로 계시는데 뎃생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보니 통영 출신인 김용주 선생님이었다.

나는 1985년 일본 나고야 매일신문사 초대로 신문사 내 화랑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었다.  전시 기간 중 한 노화백이 나에게 "통영출신의 김용주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 노화백은 김용주 선생과 가와바다 미술학교에서 동문 수학하신 분이었다. "김용주 선생의 스승은 일본의 매우 유명한 여류 화가였으며, 당시 일본에서 선생은 뎃생의 귀재였다"고 칭찬 하셨다. 그 노화백은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쯤 와주셨고 그때 그 감동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선생의 소실된 작품 중 나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작품으로는 선생님의 동생 김용기(통영수고 국어 선생님)의 초상화로 F100호의 대작으로 지금 호암 미술관에 소장된 <자화상(73 X 61cm , 유채, 1938년~1940년경)>, 이 두 작품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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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동란때 인민군이 통영에 들이닥쳐 선생님 집 계단 위에 걸어둔 작품을 사람으로 오인하여 따발총으로 난사, 캔버스에 6발 정도 구멍이 나 "용기야 미안하다" 말씀 하시고 파기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제작한 선생의 작품들은 명작이었다.  정확한 뎃생을 바탕으로, 감성에 의한 심상의 채색, 강한 터치, 색감의 명도와 깊이, 생동감 넘치는 눈빛, 어느 하나 험 잡을 데 없는 회화의

본질을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나는 많은 그림을 보았다.

선생님의 그림은 어느 세계 명화와 비교할 수 없는 명작 중의 명작이었다.
김용주 선생의 작품 중 자화상 (73 X 61, cm 1938년~1940경, 당시 28세)), 암(岩, F20호)은 초겨울에 산양면 장군봉 넘어 바닷가에서 나이프 작업으로 제작하였다.

나이프 면의 교차점에 선으로 표현된 걸작으로 이 그림을 그리면서 "종석아 이 세상에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면과 면의 교차점에서 선으로 보일 따름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지금도 나는 작업을 하면서 선생님의 이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두 작품은 1963년 서울 수도화랑 유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81년 호암미술관에 본인이 소장하다가 기증하였다.

호암미술관 개관기념 표지 작품으로 선정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한국 현대 미술관 소장 <방위(防衛 )1938년작품>, 기록에는 작품의 명제가 투계로 소개되고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이 그림의 수탉은 국가이고 암탉은 국민으로 보고 감상하여야 한다.

1938년경 제작한 것으로 암탉이 평화롭게 모이를 먹고 수탉은 당당하게 암탉을 보호하는 자세로 그려져있다. 

나라는 국민을 보호한다는 깊은 애민심을 표현한 그림이다.

해방 되기 2년 전 선생의 딸인 미섭이 통영 보통학교 입학 때 기증, 학교본관 2층에 오랫동안 전시 됐으며, 선생이 작고 하신 후 사모님께서 반환 받아 보관하다 본인의 주선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통영보통학교에서 전시 중이던 <방위 / 일명: 투계>는 작품의 상징적의미가  문제가 되어  그 당시 학교 본관건물에 더 이상 전시를  못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김용주 선생의 작품을 연대별로 보면 대작은 20세-30세 초반의 작품들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김용기 선생 초상화>, <자화상>, <방위(투계)>가 25-28세 사이의 작품으로 세계 어느 명화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작품으로 예술혼이 화폭에 담겨 있다.

강한 색채, 정확한 뎃생, 깊고 깊은 내면의 세계를 표출한 작품으로 젊은 나이에 회화적 경지에 도달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서울조선호텔 앞, 미공보관에서 제1회 한국현대작가 유작전이 있었다. 한국미술협회 박득순(초대이사장)주최, 추진 위원장 김흥수 화백, 전국에 작고하신 화가의 작품전이다.

당시 통영에는 한국 미협 지부가 없었지만, 본인과 박득순 화백과의 친분으로 한 기성사무국장으로부터 작품제출 위탁을 받았다.
통영에서 김용주, 이중섭, 부산에서 서성찬 화백의 작품을 모아 참여 하였다.

김용주 선생은 <해바라기>, <백합>, <나부>. 이중섭 작품은 <흰 소>, <어린 송아지>, <까마귀> 등 당시 김기섭 님 충무 민선 초대시장 (국회위원 10, 12, 15, 16대 4선 위원 김동욱님의 부친)이 소장한 작품들. 부산에서는 서성찬씨 작품 3점을 수집하여 참여하였고, 나는 1주일 동안 전시회장 관리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 김용주 선생의 <방위(투계)>, <자화상>, <岩>을 출품했다면 이중섭 이상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이중섭 화백은 <흰 소(대표작)>로 많은 주목을 받고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이중섭 화백은 무명이었고 나전칠기 양성소에 재임 중 이었다.
김용주 선생께서는 가난과 병마에 고생하는 이중섭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친구인 김기섭 시장님께 권유하여 이중섭 화백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통영에서는 제1회한국현대작고유작전(1963)제1회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1962년 서울 중앙공보관 1층에서 개최) 에 출품했던 <백합(현재, 충무서점 김광현씨 소장)>외 단 한점도 발견되지 않아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박득순 한국 미술협회 이사장님의 추천으로 1963, 9월 3일-9일 까지 서울명동 수도사대내 수도화랑에서 김용주 유작전을 가졌는데 많은 미술학도와 화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제1실은 박종석(본인)의 전시장이었으며, 제2실은 김용주 유작전 전시장이었다.

김용주 선생의 짧은 일생을 정리 하면,1910년 통영에서 출생한 후 1926년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 그해 4월 일본 동경 明治 학원에 입학하셨다. 1929년 일본 동경 카와바타가학교 양화부(川端畵?校 洋?部) 입학하여 1934년 카와바타가학교 양화부(川端畵?校 洋?部)를 졸업하였다. 1934년 4월 미술학교 졸업생 자격으로 카와바타가학교 (川端畵?校) 인체 연구실에 입문하셨다. 940년 일본 동경 카와바타가학교 (川端畵?校)  인체연구실에서 수학하고 고향 통영에 귀향 하였다. 1952-1954 통영 녹음다방에서 3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1월 15일 부산 동래구 온천동 345-43 큰딸 봉자家 새벽 3시에 작고, 통영 미래사 효봉스님께서 재를 모셨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출국하여 15년이란 세월을 동경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에서의 친구가 한정 되었을 것이다.

유복한 환경 (당시 만석지기) 생활 속에서 유학 당시 통영에서 동경으로 유학 온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며 학창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유치진, 유치환, 윤이상, 김용식, 김기섭, 이정규, 김상옥, 황화수, 김춘수 등의 통영 친구가 있었으며, 畵友로는 이중섭, 양달석, 박생광, 홍영표, 대구의 주경선생과 친분의 정을 나누었다.

봄가을에 꿩 사냥을 좋아했고 애견 수지를 귀여워했다. 싸움닭을 기르고 친구들과 항상 여유 있게 여생을 보냈다.

나는 1953년부터 1958년 7월까지 선생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처음 석고 뎃생 부터 시작하여 수채화, 유화 까지 부분적 반복교육으로 하나의 사물을 철저히 분석, 이해하고 완전하게 소화 할 때까지 지우고, 다시 그리는 작업 속에서 새로운 조형세계를 깨우치게 하여 완성도를 성숙하게 하는 철저한 교육이었다.

이 교육은 1958년 홍익대학 입학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는데 큰

도움이 되았다.

사물을 각으로 분해하여 기초를 잡고 그 각을 지우므로 완전한 형태와 명암을 표현하는 석고 뎃생의 철저한 교육 방법이었다.

선생의 미학은 말씀 하나하나에 주옥 같은 예술의 혼이 담겨 있었다.

화가가 되는 방법(길), 작가의 생각, 그림과 한 인간의 융합상태의 철학 등등 책을 한 권 쓰고도 남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 나의 예술의 길잡이가 되었다.

스스로 깨닫게 하여 진정한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깊고 튼튼하게 하여 자신의 인생관을 자연과 사물의 내면세계의 중심에 두고 작품을 제작하도록 지도하였다.

선생님께서 돌아가기 몇 개월 전 1958년 7월 나는 유화 몇 점을 선생님에게 보여주었다.

"종석아 이제 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시고 퍽 기뻐하셨다. "이제 너 홀로 고민하고 사색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그해 8월에 군에 입대하였고 6개월 후 선생은 작고 하셨다.

50년 만에 미륵산 정산에 서니 파란 하늘아래 쪽빛 바다, 크고 작은 섬 사이사이로 정다운 사연을 싣고 오가는 배들, 인걸은 간데없어도 고향 풍경은 옛 그대로이다.

저 아래 산양면 선생님의 농가가 있었던 둔전 마을이 보인다.

해방 이후 조선조 말 만석 대농의 지주 인동 영감님의 증손으로 태어나 그 많은 옥토를 토지 개혁으로 소작인에게 내어주고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내색 하지 않았다. 

해바라기처럼, 향기로운 백합같이 선생님의 작품 '먼 길' 속으로 중절모를 쓰고 파이프에 지팡이를 짚고 수지(애견)와 함께 환한 미소를 지우고 걸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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