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아 따뜻한 겨울을 갈망하고 희망찬 새해가 되길 다짐한다.

떠오르는 첫해처럼 밝은 희망을 품고 임진년 한해를 힘차게 달릴 준비된 통영의 용띠들을 만나봤다. 

▲ 2000년생 최민교 군.
2000년생 밀레니엄 베이비 최민교(13) 군.

"청개구리는 항상 가슴에 비를 품고 살지요. 때문에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올해 제 소망입니다."

초등학생 같지 않는 말투에 행동도 의젓한 최민교 군(13·용남초)은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다.

늦둥이 민교군은 누나 둘에 형까지 있어 평소 사랑을 독차지 하며 살고 있다.

다만 늦둥이라 민교군의 아버지가 친구들 아버지에 비해 나이가 조금 많은 편이기 때문에 민교 군이 대학생이 되면 아버지는 환갑이 되신다.

그래서인지 다른 친구들이 크리스마스 때 장난감 사 달라, 이거저거 사 달라 때 쓸 때, 민교군은 아버지와 함께라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효자이면서 가장 든든한 아들이다.

민교군은 어린 시절 청개구리 이솝우화에서 부모 말을 듣지 않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비만 오면 우는 청개구리 일화를 보고 너무 슬펐다고 한다.

"청개구리의 부모는 죽기 전, 평소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게 지시하면 또 반대로 행동할지 알고 무덤을 냇가에 만들라고 했다. 그러나 부모의 임종 후 청개구리는 운명의 장난인지 부모의 유언을 그대로 실천, 결국 청개구리는 부모의 무덤을 진짜 냇가에 묻어버리는 실수를 했다. 결국 장마 때 부모의 무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돼 청개구리는 부모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됐다"며 비만 오면 우는 청개구리를 보고 민교 군은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해드려야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아직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잘못해도 얼마든지 용서가 되는 나이임에도 벌써부터 조숙하고 효심이 깊어 이러한 발상을 한다는 것에 놀라웠고, 앞으로 민교 군이 훌륭한 청소년으로 성장하길 바래본다. 

▲ 1988년생 최세헌 씨.
1988년생 최세헌(25)씨.

"새해도 가수의 꿈, 진인사 대천명!"

지난해 2월 27일 강승모 작곡의 '제발 나만큼만 사랑해줘'로 디지털 싱글앨범을 공개하고 쇼 케이스까지 무사히 마친 4인조 남성그룹 소울트리의 멤버 최세헌(25·통고 61기, 경남대 졸)씨.

그도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 등 가수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에 발 맞춰 총 3개월에 걸쳐 유명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신사동호랑이 오디션에 참가, 1차 UCC 심사, 2차 미션 곡 심사, 3차 그룹별 창작미션 심사로 진행됐던 오디션의 최종 합격자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통영에 아무도 없다. 결국 통영출신 무명가수가 탄생한 셈이다.

지난해 3월 20일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이벤트 홀에서 쇼 케이스를 치를 때만 해도 통영출신 개그맨 허경환에 이어 또 다른 연예인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결국 무산, 단지 쇼 케이스만 무사히 마쳤을 뿐이다.

현재 최씨는 통영의 한 휴대폰 대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그의 최종 꿈은 변함없이 멋진 가수가 되어 미국에 진출하는 것이다.

"난 열심히 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겨야겠죠!"라며 아직 무명가수지만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지난해 인터뷰 때와 마찬가지로 당찬 모습을 보여줬다. 

▲ 1976년생 신정화 씨.
1976년생 신정화(37)씨.

"딸 넷 엄마의 새해소망은 딸들을 아들처럼 씩씩하게 키우는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통영 다둥이네 가족'에 비하진 못하지만 딸 넷 엄마인 신정화(37·주부)씨도 통영에서 어린자녀 뒷바라지로 따지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대단한 주부다.

그녀의 하루는 6시에 남편 출근, 8시 반에 큰딸 등교, 9시 반에 둘째 셋째 등원, 하나씩 챙겨 보내고 나면, 막내가 밤에 실례한 이불을 돌려 넌다.

빨래와 집안일을 하다 오후 3시쯤 되면 첫째, 둘째, 셋째가 속속들이 집으로 귀가한다.

집에 오면 딸 셋이서 뛰고 떠들고, 우당탕탕, 밥을 먹는지, 운동회를 하는지 난장판을 한바탕 한다. 간간히 "엄마! 누가 때렸다, 밀었다"며 고자질을 하러 와서 아기를 깨우기도 한다.

아기 젖을 먹이고 트림을 시키느라 배에 얹어서 등을 토닥토닥하며, 밖의 소리를 무시하려 애쓰다 아기가 잠이 들면서 신씨도 가물가물 잠이 와 잠깐이지만 꿀같이 단 잠을 자곤 한다.

신씨는 "막내만 자도 훨씬 한가하고 마음이 여유로운데, 막내딸이 울고 딸 셋이 통제가 안 되면 나도 감정 추스르기가 힘들어서 자꾸 소리를 지르게 된다.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가야지, 하다가도, 화가 확 뻗칠 때가 있다"며 결국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안한다고 한다.

딸 넷을 돌보느라 힘들고 바쁘지만 "항상 즐거운 시간, 지금을 즐기자"는 긍정적 마인드로 그녀의 보물 넷을 사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고 딸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만큼 행복이 남 다르다고 한다.

"엄마 한번 안아보자"며 큰 딸이 와서 안아주고 뽀뽀도 하니, 덩달아 둘째 셋째도 와서 안아주고 뽀뽀하고 "안녕히 주무 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또 딸이 넷이다 보니 여자 아이들끼리 자라면서 서로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요즘에는 친정어머니가 애들을 돌봐줘 한결 여유롭다고 한다.

그녀의 주변사람들도 지금은 정신이 없겠지만 나중에는 행복할 거라며 많은 격려도 해주고 있다.

신정화씨는 "더 이상의 자녀계획은 없다. 단란한 가족을 꿈꾸던 신혼시절이 있었지만 지금도 행복하다"며 "정말 아이들은 최고의 보물이다. 새해에도 남편과 내가 뼈 빠지게 돈 벌어서 과거 내가 젊었던 시절 송혜교 소릴 들은 거처럼 딸들도 예쁘게 키우겠고 아들은 없지만 딸들을 아들처럼 씩씩하게 키우겠다고"고 새해 소망을 다짐했다. 

▲ 1964년생 유용문 씨.
1964년생 유용문(49)씨.

"무감어수(無鑑於水) 감어인(鑑於人)이란 말처럼 살겠습니다."

무감어수(無鑑於水) 감어인(鑑於人)은 물에 자신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 안에 자신을 비추라는 말이다. 즉 물이나 거울을 통해 보여 지는 외피만으로 자신을 보지 말고, 사람들을 통해 이해되고 있는 내면의 자신을 보라는 의미다.

유용문(49·통영예총 사무국장)씨는 지난해 미륵도 시의원 재선거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더욱 성숙해졌다.

유씨는 선거발표 다음날 아침,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한다는 현수막을 미륵도에 제일 먼저 걸고,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선거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인사를 했더니 "역시 유용문 답다"며 주위 분들이 오히려 격려를 해줬다고 한다.

유씨는 "선거는 주민의 마음을 얻는 것인데 주민의 판단은 현명했고 주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후보자에게 잘못이 있었다. 오히려 내가 살아온 것 살아갈 것 등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선거를 통해 어떤 사람은 상처를 받고 실망을 해서 인간관계 단절과 사회생활을 힘들어 하는 사람도 많지만 난 선거를 통해 많이 배웠고 나를 지지해준 700명의 유권자 분들께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요즘 유씨는 통영예총에 복귀, 사무국장으로서 올 4월에 있을 동피랑 벽화작업과 연대도 할매공방 활성화를 위해 불철주야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작지만 다양한 통영경제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으며, 주민스스로 관리하고 재활용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다.

최근 고민에 대해 묻자 "왜 지금은 통영이 예향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예술은 자기 고집과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종종 친구들이 대학 보낼 자녀가 있는데 예술을 시켜야 하나 말아야 하느냐 묻는다. 예술을 하고자 하는 친구들과 후배 예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예술을 하려면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며 결국 자신의 문제다.

전혁림 선생님의 경우 60대 이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아마 모든 예술인들의 가족들이 이러한 것을 감내했을 거다. 지금 지역인재육성기금을 가지고 통영 문화예술인을 키우고 있다. 20년 후에는 고무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 확신한다.

선거도 해보고 이제 50줄의 나이, 즉 지천명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냐 묻자 "말 그대로 지천명은 천리를 아는 나인데 기본에서 출발하자고 다짐했다. 나의 가정과 통영예총, 사회관계에 대해 다시 반성해 보고 내가 어떻게 이들에게 기여할 것인가, 50이란 나이가 아직 늦지 않았으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회에 기여를 하면서 가정에 충실해보자"며 사회적 일을 빌미로 그동안 가정에 너무 소홀했던 것을 아쉬워했다. 사실 유씨는 통영오광대 말뚝이부터 연극, 풍물강사 경력은 20년이 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유씨의 새해소망은 "성웅 이순신의 경영자로서의 마인드, 문필가로서의 예술성, 장군의 기백과 기운을 이어받은 통영시민들이 경제적으로나 마음 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지만 앞으로 좀 더 파이팅 해서 더욱 함께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자"고 말했다.

▲ 1952년생 김재권·박경순 부부

1952년생 김재권·박경순(61) 부부

"니 새끼 내 새끼가 어딨니! 통영 살면 다 내 새끼지."

구세군 냄비가 거리에 넘치고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는 그런 풍경은 통영에선 최근 몇 년 사이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줄었지만, 그래도 통영의 각 사회단체와 자원봉사자들은 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에 더욱더 지쳐가는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자 한참 분주하다.

그중에서도 중앙동 데파트 뒤 '종도형 방앗간'을 30년 동안 운영하면서 올해로 25년 동안 결손가정 아이들을 키워 대학교까지 보내고, 거기에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매년 떡국거리를 나눠주고 있는 의로운 내외가 있다. 바로 김재권(61)·박경순(61) 부부다.

지난 20일, '2011 사랑의 떡국거리 나누기 행사'에서 통영의 인심이 아직도 훈훈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김재권·박경순 부부는 겨울에 쓸쓸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과 독거노인들의 어려움을 절실히 느끼는 듯 행사 내내 가장 바쁘게 일했다.

통영경기가 어렵다어렵다 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마음이 추우면 몸도 따라서 시린 겨울이지만 이 부부를 보면서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억척여장부로 불리는 박경순씨는 "큰 아들 때문에 시작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21살 때 중앙시장에 오게 됐다. 그때 나에겐 친자식 6남매가 있었다. 그 중 큰 아들을 바르게 키우는 것에 실패했다. 우리가 먹고 살기 급급했기에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결국 아이는 구정물에 몸을 담그게 됐다. 아마 큰 아들은 내놓으라는 놈이 돼서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때 내 아이를 바로 잡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결손가정 아이들을 거두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는 결손가정 아이들이 주위에 상당히 많았다. 배고프고 굶 주린 아이들이 결국 내 자식처럼 될까봐 안타깝고 두려웠다. 그래서 결손가정 아이들을 하나 둘 거두다보니 20명 가까이 키우게 됐다.

정량동 우리 집에서 키우는데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먹는 것을 충당하기가 제일 힘들었다. 다행히 동네 어르신들이 김치와 쌀을 같은 것을 많이 갖다 줬다. 그 당시 남편도 처음엔 반대 했지만 어르신들의 도움에 보답하고자 맨바닥 헤딩하며 1원도 없는 시장 바닥에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며 지금까지 의자하고 있고 정말로 우리는 단 1원도 도움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지금 그 아이들 중 대학까지 마친 놈이 2명이고, 엄마 아빠가 없던 아이가 올해 대학 4학년 졸업반이다. 중3때 거뒀던 아이들 중 2년제 대학을 졸업한 아이도 몇몇 있다.

그 아이들이 줄었다 늘었다 한 것처럼 나에게 찾아오는 것도 맘대로, 가는 것도 맘대로 이다. 그 아이들을 다 거둬서 키우고 보내고 나니깐 뭔가 시원섭섭했다. 그때부터는 내가 뭘 해야 되겠나 생각해서 자원봉사에 뛰어들었다. 내 힘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자원하여 힘껏 봉사한다.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으면 더 할 것이다.

종도형 방앗간의 이름의 유래에 대해 묻자 "그 당시 애들 20명 중 둘째가 종형이, 셋째가 도형이라서 둘이 합쳐 종도형 방앗간을 만들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돌아다니는 애들 잡아다 좋은 것 못 먹여도 라면이라도 먹이고 상고졸업은 다 시켜줬다.

통영시장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중앙시장 경기가 좋다고 할 수도 안 좋다고 할 수도 없지만 나는 아직 바지개떡을 전국으로 많이 유통 시키며 내 힘이 닿는 죽는 그날까지 봉사하고 살 테니 정말로 제일 소외된 어린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이를 꼭 돌봐 달라는 것이다. 또 자식이 있지만 국가에서 지원을 못 받는 사람들 꼭 챙겨봐 주셨음 한다며 훌륭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겸손해서, 부끄러워서 말을 아낀다.

이런 선행을 베푸는데 통영시에서 상을 받은 적이 없느냐 묻자 박경순 씨는 "방앗간하며 25년 동안 결손가정 아이 키우면서 무엇인가를 바랐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옆집에 사는 애들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봤을 때 마음이 약해지고 너무 딱해서 그냥 못 지나가겠다. 상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부모 없이, 의지할 데 없이 눈물 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따뜻함을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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