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채주·이학이·허장완 3열사 성역화 앞장…3.1운동 자료 통영문화원 기증

▲ 통영문화원 선정 2008 통영향토문화상 수상.
3열사 묘비이설 추진위원회 구성 337명 연대 서명, 원문고개로 이전 주역
허장완 장례식 통영청년단 결성된 통영청년단회관 근대문화유산지정 큰 몫
통영청년단 직인, 청년단가 모든술음 악보 등 20년간 수집자료…문화원으로

매년 3.1절이면 원문공원 3.1기념탑과 통영만세운동의 주역 고채주·이학이·허장완 3열사비 앞에서 기념행사를 열고, 강구안 문화마당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다함께 외친다.
 
또 통영지역의 항일독립운동 세미나와 여성항일독립운동 세미나, 그리고 통영의 독립운동 관련 연구도 거듭, 매년 새로운 연구 성과물이 쏟아지고 있다.
 
올 신년벽두에는 통영청년단 회관을 비롯 통영근대문화유산 활용방안 세미나까지 발전, 한층 더 통영근대사에 대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평가다.
 
그럼 통영만세운동 3열사의 묘와 통영만세운동 자료를 발굴, 성역화에 앞장선 이는 누구일까.
 
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故 김문환(1924-2010) 옹이다.
 

 
그는 통영문화원의 창립 회원이었으며, 통영문화원 산하 통영향토연구소장으로 3열사의 묘와 통영만세운동을 일찍부터 주목해왔다.
 
또 통영 청년 항일운동의 본산 통영청년단 자료 발굴과 기증으로 통영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해 냈고, 통영청년단 회관(구 통영문화원, 현 통영사연구회 건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한 인물이다.
 
통영 만세운동의 시발은 1919년 3월 12일 장날을 기해 진평원, 권남선, 양재원 등 9명의 청년들이 주동, 봉기하려 했으나 10일 새벽 일본 경찰에 발각돼 주모자 9명이 거사 직전에 모두 체포됐다.
 
그러나 당시 하와이로 망명, 미주국민회 간사로 있던 고채주(당시 59세)가 밀입국, 20일 후인 4월 2일 현 통영시 중앙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 3천여 장꾼들과 합세,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생전 한산신문에 기고한 육필원고.

이 사건으로 일경에 붙들린 주모자 3명이 대구부산형무소에서 1년∼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이들 가운데 이학이(당시 22세), 허장완(당시 21세) 등 세 열사가 옥중에서도 독립정신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에 의해 옥사하거나 가석방돼 나와 숨졌다.
 
이학이 열사는 6개월의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 해 9월 부산형무소의 부설병원에서 사망, 부산의 최천택 등 청년들에 의해 객선으로 통영으로 운구돼 8일장을 치렀는데, 장례기간 동안 곳곳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불러 죽음 이후에도 민족혼을 일깨웠다.
 
또 6개월형을 받은 허장완은 부산감옥에서 마산형무소로 이감, 모진 고문으로 그해 10월 9일 옥사했다.
 
허 열사의 시신은 마산청년단들이 배둔까지 운구하고, 배둔청년들은 고성까지, 고성청년들은 다시 통영까지 운구하는 등 시체를 옮겨 왔으며 운구를 하는 길목마다 주민들이 일경의 삼엄한 경비 아래에서도 민족혼을 과시했다.
 
또 고채주씨는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중병으로 가석방, 통영면 도남리(현 도남동)에 돌아와 1920년 6월 21일 60세의 나이로 세월을 떠났다.
 
특히 그는 40세의 나이로 하와이로 망명, 마카월린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1906년 교포들을 모아 자강회를 조직했고, 1908년에는 한인합성협회와 전미주한인공립협회를 통합, 국민회를 창설하는 등 해외독립운동의 큰 기둥이었으며, 고향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열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1990년대까지도 고향에 무덤이 없거나 있어도 돌볼 사람이 없어 야산에 버려져 있었다.
 
▲ 김 옹이 희사한 통영청년단의 각종 스탬프 및 직인.
▲ 김옹이 희사한 각종 스템프 및 직인과 통영청년단사진.(왼쪽부터 신수동, 최영기, 방정표, 박성숙)

고 열사는 당시 통영시 봉평동 산언덕에 안장됐으나 해외에 있는 아들이 30여 년 전 다시 화장, 유골을 모셔가 고향에는 무덤조차 없어졌다.
 
이 열사의 경우는 총각으로 자손이 없고 인척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모두 떠나 통영군 용남면 장문리 산비탈에 묻혀 있지만 잡초만 무성한 채 주인 없는 무덤으로 팽개쳐 있다.
 
또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은 앞면에 이 열사의 이름만 남아 있었을 뿐 측면과 뒷면에 새겨졌던 행적은 일경이 돌을 쪼아 모두 지워버렸다.
 
허 열사의 무덤도 용남면 동달리 산기슭 가족묘지에 안장돼 있었다.
 
▲ 1970년대 3열사묘를 찾아다니며 통영청년회의소 회원들에게 역사를 알려주는 김문환 옹.

이 3열사 묘비를 집념 있게 찾아낸 이가 바로 김문환 옹이다.
 
김 옹은 1970년대 당시 충렬사 이정규 이사장으로부터 통영군민 성금으로 만든 3열사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6년간 우여곡절 끝에 3열사 묘비를 모두 찾아냈다.
 
1986년에는 3열사의 만세운동 자료수집과 옥사 경위, 묘비 등을 탁본, 3열사의 구국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기념관 등에 자료를 보냈다.
 
동시 원문공원 3열사 묘비이설 추진위원회를 구성, 337명의 연대 서명을 받은 후 묘소 성역화 작업으로 지금 3.1기념탑 앞 3열사비(실제로는 허장완 열사 유족 반대로 고채주, 이학이 열사 묘비만 있다)가 서 있다.
 
한 때 시군 단위의 3.1절 행사가 일체 금지된 시절에도 김 옹은 유족들과 더불어 추모제를 지내는 등 3열사와 3.1운동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또 1999년 건강이 한때 악화되자 김 옹은 허장완 열사의 장지에 모인 80여 명의 우국 청년들이 조직한 통영청년단 직인, 김기정 사건 재판 기록문 및 활동사, 청년단가 '모든술음' 악보, 3열사 사진 등 자신이 20여 년 동안 수집한 자료를 통영문화원(김세윤 원장 시절)에 기증, 세간을 놀라게 했다.<한산신문 1999년 3월 6일 5면 기사 통영청년단 회관 문화재 지정 요구, 5월 29일자 6면 통영지역 3.1운동 자료 기증>  
 
통영문화원이 새원사 이전하기 전까지 이 자료들이 문화원 입구에 전시돼 있기도 했다.
 
그 결과 77년 전의 자료가 빛을 발해 통영청년단 회관이었던 그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 지역사 연구는 물론 역사에 깊은 관심으로 재단법인 통영충렬사에 소장된 140여 년 전에 그린 명조팔사품 16폭 병풍 그림을 재현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통제사 휘하의 병사들이 바다에서 펼치는 진법 훈련인 수조도를 다시 모사, 평생 재현과 보급에 앞장섰다.
 
또 한산대첩에 참가한 김산걸 장군 후손 김채정씨 자료와 추사서첩, 악무목후출사표 등 300년 된 고서 95점도 통영문화원에 기증하는 등 통영문화와 지역사 사랑에 끔직했다.<한산신문 1999년 3월 27면 3면 300년 된 고서 95점 기증>  
 
그 결과 통영문화원 선정 '2008 통영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시상식 당시 "누구나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가장 행복하다. 나 역시 지역 문화 사랑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소감을 밝힌 김 옹은 2010년 9월 15일 87세의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태극기 휘날리는 3월. 4차에 걸친 통영만세운동의 그 피 토하는 통영민의 "대한독립만세∼" 소리와 김문환 소장의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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