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과 향인들, 당항포 대첩 숨은 주인공 '월이' 문화 브랜드화
월이 역사 탐방코스 개발, 월이 달력, 뮤지컬·영화 제작까지 총력

 

조선의 잔 다르크 '월이'(月伊) 열풍이 고성을 강타한 가운데 월이 발굴의 일등공신 정해룡 시인이 2017 연초부터 주목받고 있다.

고성에서는 월이 소설책은 물론 월이 역사 탐방코스 개발, 출향인들이 제작한 월이 달력을 넘어 이제 영화 제작까지 당항포 대첩의 숨은 주인공 월이를 발굴하고 브랜드화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월이는 조선조 임진왜란 때 군인도, 남성도 아니면서 경남 고성 당항포 대첩의 일등 공신으로 전해진 야사 속 인물. 훗날, 충절의 기생 논개를 넘어 '조선의 잔 다르크'가 된 '무기정(舞技亭) 기생 월이(月伊)'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었던 왜군은 남해안 지형을 사전 조사하기 위해 승려로 가장한 첩자를 조선으로 보낸다.

몇 달간 지도를 작성하며 임무수행에만 골몰했던 첩자는 고성의 옛 무학동 무기정 기생집에서 진득하니 회포를 푸는데. 그녀가 바로 월이였다.

술에 취해 쓰러진 남자의 가슴팍에서 비단보를 발견한 월이는 깜짝 놀란다. 장차 조선을 침략 전술과 바닷길 공략도, 육로의 도주로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남자가 사용하던 붓을 찾아 든 월이는 당항만이 바다로 이어진 것처럼 정교하게 지도를 바꿔 다시 남자의 품에 넣었다.

임진년 6월5일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월이가 조작한 지도만 믿고 당항포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인다. 이순신의 전략에 밀린 일본군은 바다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지도에 표시된 바닷길을 찾을 수 없었다. 퇴로가 막힌 일본군은 결국 전멸하고 만다.

당시 왜선은 산산조각이 났고 물 위에 떠오른 왜적의 머리 수백 두가 썰물에 밀려 소포쪽으로 밀려왔다. 그 후부터 머리가 밀려왔다고 해서 이곳을 '두호'라 부르게 된다.

특히 월이가 그린 지도를 따라 간 왜장은 '속았다'고 분개 했고 당항포 앞바다는 속은 갯가라는 뜻의 '속싯개'라는 지명이 붙는다. 하지만 월이 자신은 지상으로 공격해 온 왜군에게 붙잡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진주 논개에 가렸던 월이의 충절은 420여 년이 지나서야 고성출신 시인이자 작가인 정해룡 선생에 의해 재조명된다.

정 작가는 2012년 펴낸 역사소설 '조선의 잔 다르크 월이'를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졌던 월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는 "명작의 무대는 결국 작가의 고향이다.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과 '토지'는 결국 통영의 산물이다. 통영에서 문협회장을 거쳐 예총회장을 역임한 후 고향 고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것이 바로 월이였다"고 말했다.

곧 바로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를 찬찬히 분석하며 5번 읽고, 세계 명작들을 다시 한 번 탐독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1년을 더 살았다. 이순신 장군 관련 자료와 책,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또 읽었다. 그 결과 탄생한 인물이 월이였다.

1590년 월이라는 인물을 통해 고성의 역사를 날줄과 씨줄로 엮고, 사랑얘기도 구성했다. 지명과 인물들은 역사 속 고증을 통해 실증해냈다.

그는 "논개는 적장 하나만 안고 죽었으나 월이는 왜적의 함대 26척과 3천여 명의 적 수군을 대파한 일등 공신이다"며 영국의 백년전쟁기 조국 프랑스를 구원한 소녀 잔 다르크에 견줬다.

이에 각종 방송과 언론매체에 소개되고, 고성군은 월이 이야기를 담은 고증자료, 소개글 그리고 8분여 분짜리 영상물까지 별도 제작해 당항포관광지 내 전승기념관을 꾸몄다.

또 당항포대첩축제 때 '조선의 잔 다르크 월이'를 주제로 한 전국 스토리텔링 대회를 통해 그녀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군민들과 역사 탐방코스도 개발했다.

재경향인들은 힘을 모아 2017 월이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기 시작하고, 불멸의 이순신 시나리오 작가, 전 현직 방송인, 기업가들이 뜻을 모아 월이 뮤지컬과 영화 제작 운동이 일고 있다.
정해룡 작가는 "고성 땅에 420년간 묻혀있던 월이를 발굴해냈다는 자부심은 있다. 훌륭한 관광상품을 만들기 위해 고성군과 향인들이 힘을 모아 다양한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큰 박수를 보낸다. 열심히 힘을 보태겠다"고 반가움을 표했다.

한편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를 발굴한 정 작가는 통영문협회장, 통영예총회장, 청마탄생100주년기념추진위원장, 박경리장례집행위원장, 고성군지 상근집필위원을 역임하고, 고성인문학강좌를 개설 운영 중이다.

시집 '꿈 하나 남아 있다면', 산문집 '통영문화지도-예향 통영'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 '나무가 들려주는 고성이야기' '고성문화지도' '고성독립운동사' 등을 저술했다.       

당항포해전의 월이月伊

정 해 룡 <시인·작가>

이순신에게 당항포 일대에 적이 있다는 첩보가 전해졌네.
1592년 6월 5일 오전, 이순신의 함대는
당항포의 좁은 수로를 따라 고기두름처럼 일렬로
소소강 서쪽 기슭에 이르러서 보니
크기가 판옥선만한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
모두 26척이 정박해 있었네.

두호리 앞 바다를 막아선 이순신이
적함을 향해 "발포하라!" 명령을 내리고
적을 유인해 너른 당항포로 나오자
적들은 사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검은 돛을 2개나 단 대장선인 층각선을 필두로
허겁지겁 당항포 바다 한가운데로 따라서 나왔네.
그러자 유인하던 조선수군은 갑자기 선수를 돌려
총통과 불화살을 비오듯 퍼부어 적함을 불태웠네.
거북선도 맹렬히 포를 쏘아 격파했고
좌충우돌 적의 배를 그대로 들이받아 격침시키자
왜군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경악했네.
살아남은 그들 중 일부는 뭍으로 올라 도망을 쳤다네.

이날 전투의 승리 뒤에는 한 여인의 숨은 공로가 있었으니…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고성읍 무기산 아래 무기정 기생 月伊는
승려 복장을 한 왜의 첩자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네.
승려의 언행을 수상히 여긴 月伊는
그날 밤 술에 취해 떨어진 첩자의 바랑을 열어보니
고성의 바닷길과 육로의 정보가 담긴 지도를 발견했네
왜의 첩자임을 알아챈 月伊는 지도를 조작하여
부모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을 했네.
당항만과 육지 건너편 고성만 바다까지
연결된 것처럼 없던 뱃길을 정교하게 한길로 그려 넣었네.

왜장은 뱃길이 없음에 속았다고 길길이 날뛰며 분개했고
이때부터 두호리·거산리 일대 소소포 앞바다를
'속이고' '속은' 갯가라는 뜻의
'속싯개'라는 지명 유래가 생겨났네
왜적의 머리 수백 두가 밀물 따라
소소포 두호리 쪽으로 밀려와서
이곳을 '두호 또는 머릿개'라 부르게 되었다네.

그러니 제1차 당항포해전은
무기정 기생 月伊의 기지와 나라사랑이 녹아 있는
구국충절의 해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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