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윤이상은 통영의 수치

▲박청정(전 해군사관학교 교수)

 

 

우리나라는 휴전상태에서 자유번영 통일을 위해서 대간첩작전을 수행함과 동시에 세계평화를 위하여 최초의 해외파병으로 1964년부터 10여년간 월남전에 참전한 전시상태이었다.

1967년 2월 해군사관학교 21기로 졸업한 동기생들은 해병 소위로 월남전에서 소대장, 해군 소위는 함상에서 대간첩 작전을 수행하는 당직사관으로 대한민국의 안녕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헌신해 왔다.

야간 항해 당직을 교대하고 야식시간에 장교들이 사관식당에 모였다. 함장은 옆좌석의 기관장에게 우리도 이런 적이 있었지 하면서 박소위는 씹어 먹어도 비린내도 안날 것 같다 하면서 당직 서느라 수고했음을 격려하고 치하해 주었다. 거기까지는 매우 흐뭇하고 감사하고 행복했다.

조금 지나 함장은 너의 고향사람 윤이상을 아느냐 하면서 “통영은 간첩의 소굴이구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고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실제로 그당시 한산도의 전역해군 수병 납북, 욕지도의 지역유지 아들 잠입, 통영시내 멸치업자 아들의 월북, 해경정과 간첩선의 교전으로 인한 사상자 발생 등 통영 일원에서 수없이 간첩선이 드나들었다.

이러한 대한민국 교란작전은 한국군의 월남 증파를 못하게 하여 북한 김일성은 월맹 호지명을 지원하는 효과를 도출했다. 부단한 미국의 월남파병 증원 요청을 뿌리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귀신잡는 해병이란 별명을 얻은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김성은 국방장관은 매일 청와대에 보고하는 간첩침투는 전시작전 보고인 듯 했다는 요지의 말씀을 현역시에 귀담아 들은 적이 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통하여 이제 국내는 155마일 휴전선과 900마일 해상에서 뿐만아니라 국외에서도 치열한 대남공작이 이루어지고 있구나 하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물샐 틈 없는 안보태세 확립을 다짐하기도 했다.

1967. 7. 8. 정부에서 윤이상을 주범으로 하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윤씨는 1967년말 1심에서 무기징역, 1968년 2심에서 15년, 1969년 3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간첩사건이다. 그해 2월에 복역 중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어 두 번다시 반한활동을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추방형식으로 출국시켰다.

국정원에 의해 윤이상의 기만유인은 독일의 주권을 침해한 납치로 규정되어 주한서독대사 소환, 대한차관 취소 조치에 독일과의 우호친선과 파독 광부, 간호사의 경제활동을 위하여 약소국의 비애를 감내하면서 되돌려 보낸 것이다.

이 사건은 문민정부라는 미명하에 국가기강을 약화시킨 김영삼 정부조차도 윤씨는 평화운동가가 아니라 자기이익을 위해 북한의 대남공작에 협조한 범법자라고 규정하였다. 그의 귀국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화계나 언론계에서는 끊임없이 간첩이 아닌 한 위대한 음악가로 재포장되고 통영에서는 고향사람이라는 감성만으로 통영의 자랑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급기야는 도천테마공원에 윤이상 동상이 서고 기념관이 세워졌다. 윤씨의 음악성은 김일성의 대남공작에 활용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띄우기도 했고 종북 좌파들에 의해서 지나치게 부풀린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통영인은 윤씨는 평화운동가 민족주의자로 위장한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였다.

이러한 윤씨에 대한 극과 극을 판단하기 위하여 노무현 정권시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다.

거기에서도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실체가 있는 간첩사건임을 분명히 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북한공작원과 접촉 50명, 북한 방문 12명, 금품수수 17명 등 실정법을 위반한 팩트라 하였다. 말미에는 다소 과장된 감은 없지 않으나 조작이 아니라고 하였다.

2013년 카자흐스탄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천재작곡가 정추 씨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

정추 씨와 윤이상 씨는 같은 남한 출신으로 월북한 음악가이지만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대가로 죽을 때까지 북한의 비호를 받았던 윤이상과 그의 삶이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1946년 북한에 계시던 형의 권유로 월북한 후 소련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에 유학 탁월한 실력으로 차이코프스키 4대 직계 제자라는 별명을 얻은 동구의 천재작곡가이다. 그후 북한의 실상을 알고 김일성의 우상화를 반대 모스코바를 거점으로 반북활동을 하였다.

정씨는 친한반북, 윤씨는 반한친북을 한 인사이다. 2011년에 한국을 방문한 정 추 씨는 나를 윤씨와 비교하지 말라고 단언하였다.

북한 장교출신 임성민은 “김씨 일가의 우상화의 나팔수 역할을 한 윤씨가 한국에서 존경을 받고 정 추 선생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남 남해 출신 조상권은 프랑스 파리 최고 건축대학교 유학생이었다가 “나는 북한 공작원이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1959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호기심 많은 젊은 유학생들은 윤이상 등에 속아 북한대사관을 찾기도 하다가 1963년 조씨는 처음으로 평양에 발을 디뎠다.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터지자 평양으로 도피하여 1969년부터 대남 공작원이 되었다. 그는 비밀리에 다른 공작원들의 국적세탁을 해주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야 잘못을 깨닫고 1997년 한국으로 귀순하여 현재는 경기도 광주 도자기문화연구소장을 지내고 있다.

박정희 정권시대의 은전을 배신하고 출국 후에도 여전히 친북반한 활동을 해왔던 윤이상은 1984년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 공작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했다. 김일성 75회 생일을 기념해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곡을 바쳤으며 부인과 함께 평양을 수십차례 방문한 친북인사이다.

1989년에는 광주 5ㆍ18 홍보 미화한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제작에 간첩으로 형을 산 황석영은 시나리오를 썼고 윤이상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주제가로 한 배경음악을 작곡하여 남남갈등을 일으켰다. 또한 윤씨는 “광주여 영원하라”라는 곡을 만들어 이를 더욱 부추겼다.

그런가하면 고향사람에게도 몹쓸 짓을 서슴치 않았다. 서독 유학생 오길남과 파독 간호사가 결혼한 소위 통영의 딸 신숙자 씨의 가족에게 월북을 강요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속은 것을 알아차리고 우선 오박사가 먼저 탈북하여 부인과 두딸 혜원, 규원을 구해내도록 약속하였다. 구사일생으로 탈북한 오박사는 윤씨를 만나 북에 남겨진 가족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니 오히려 화를 내며 재월북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독일에서 가족구명운동이 가망이 없자 1992년 한국 정부에 자수함에 따라 윤씨의 간첩행위의 구체적인 행위가 들어나게 되었다. 동향인 신숙자를 사지로 내몬 윤씨가 고향 통영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떨칠 수가 없다.

2012년에는 통영시 소재 현대교회 방수열 목사 주도하에 요덕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소위 통영의 딸 신숙자 구하기 운동이 범시민적으로 이루어졌다. 오길남 박사도 난생 처음으로 처가인 통영에 내려와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이미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구명행사에 참여하면서 저의 손을 붙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필자도 신씨와 같은 연배에다가 같은 초등학교 학번으로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6개월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2시간씩 “윤이상은 간첩이다”, “신숙자를 구하자”라는 일인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경남의 보훈단체 및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괴군에 의한 폭동이라고 학문적인 연구를 발표한 지만원 박사 일행도 참가하여 윤이상 화형식도 연출하였다.

통영을 방문하는 지인들과 관광객들 사이에서 통영은 수려한 자연미, 천연미 그리고 좋은 기후를 갖고 있어 부럽다고 하면서 딱 하나 못마땅한 것이 있다 한다. 그것은 왜 이충무공의 호국정신이 살아 숨쉬는 충절의 고장, 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윤이상 간첩을 추모하고 동상까지 세웠느냐고 항의성 문의를 하고 있다.

정녕 윤이상은 통영의 수치이다.

소설가 박경리, 영문소설가 김용익, 시인 유치환, 김춘수, 극작가 유치진, 시조시인 김상옥, 화가 이한우, 김형근 , 전혁림, 김안영, 차우용, 장치길, 아동문학가 주평, , 나전칠기 김봉룡, 옻칠 김성수, 조각가 심문섭, 승전무 한정자, 수필가 고동주, 서예가 장태조, 이순필, 작곡가 정윤주에 작곡가 윤이상도 포함되어 있는 광고를 통영에서 쉽게 눈에 띄게 된다.

문화예술은 국경이 없을지 몰라도 문화예술가는 국경이 있다. 영혼없는 예술은 김춘수 시인의 꽃이 연상된다. 윤씨 때문에 이들 문화예술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아 버리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은 과연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2017.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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