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과 창작의 활화산 통영

①이중섭과 창작의 활화산 통영

②예술가들이 본 통영의 이중섭

제주도에 살아 숨 쉬는 이중섭

④부산 범일동의 이중섭 풍경

⑤위대한 유산 이중섭, 통영은 어떻게 화답할까

 

햇볕이 따스한 가을 오후, 제주도 서귀포 몽마르뜨 언덕을 걷다보면 불현듯 맑은 눈의 이중섭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기다리며 예술혼을 불살랐던 우리들의 화가 이중섭,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모든 것을 바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예술은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라오”<1954년 12월의 편지 중에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는 비운의 예술가.

하지만 사랑하는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역사상에 나타난 애정의 전부를 합치더라도 우리가 서로 사랑한 것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오”라며 사랑과 추억이 애절하다.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이중섭거리'. 서귀포매일올레시장 건너편에서 시작해 이중섭미술관까지 350m 이어지는 길이다.

화가 이중섭을 기념해 1996년 지정된 이 거리는 이제 제주도 관광의 필수 코스 중 하나로 여겨진다. 미술을 잘 몰라도 서귀포에서는 이중섭의 발자취를 찾아 이 길을 걷고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

이 거리 인근에 이중섭이 살았던 곳이 있었다. 여기에 이중섭거리가 조성되고 이중섭미술관이 개관한 이유다.

지난 한 해 미술관 유료 관람객만 28만 명에 달한다. 작디작은 미술관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붐비고, 이중섭의 그림을 카피한 조각들과 독특한 외관들로 무장한 이중섭 거리에는 이색적인 카페와 공방, 창작스튜디오들이 관람객을 손짓한다. 심지어 하수구 뚜껑마저도 이중섭의 작품들로 추억을 나눈다.

과연 천재화가 이중섭은 백년의 세월 뒤 이 거리를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가 제주도에 살았던 기간은 11개월 남짓.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다. 그해 제주도에서 이중섭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이중섭이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월이었다. 1.4후퇴로 피난을 떠나야 했던 그는 부산을 거쳐 제주도까지 갔다. 일본에서 만난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두 아들도 함께였다.

비록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전국을 떠도는 생활이었지만 가족이 있었기에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길 떠나는 가족'에는 당시 그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다.

피난 중에 의탁한 임시거처였지만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광은 그의 예술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기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귀포의 환상'에는 그가 이 시기 느꼈던 충만한 감정이 잘 표현돼 있다.

이 시기 그가 접한 제주도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과 게, 물고기 등이 그가 평생 그리며 그리워하는 대상이 됐다는 것으로 볼 때 그는 제주도 생활에서 생애 최고의 기쁨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그리운 제주도 풍경'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심리적인 안정감과 달리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의 가족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2월 부산으로 떠날 때까지 제주도에서 그와 가족들은 피난민 보급품과 고구마로 연명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곤궁함은 그가 남긴 독특한 '은지화'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담뱃갑 속의 은박지를 철촉필로 눌러 그림을 그렸다.

제주도를 떠난 뒤인 1952년 생활고로 고통을 겪던 부인은 결국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가족들만을 보내고 한국에 남아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세계 속에 올바르게,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으로 자처하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 더욱이 조국의 여러분이 즐기고 기뻐해줄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여 다른 나라의 어떠한 화공에게도 뒤지지 않는 올바르고 아름다운,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기 위하여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소.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하에서 생활해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가족을 보낸 뒤 그는 그 그리움을 화폭에 담았다. 1952년 작품 '가족'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에서 네 명의 가족은 끌어안듯이 어우러져 있다. 그가 원했던 삶의 모습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1953년 일본에서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뒤 다시 볼 수 없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대표작 '소' 연작을 쏟아내는 계기가 됐다.

그는 통영에 머물며 이 그림들을 그렸다. 우직하지만 역동적인 소의 모습을 그림에 담으며 그는 그리움을 달랬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 그리움에 묻혀 1956년 9월6일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천재 예술가 이중섭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그림에 남아 있고, 그의 숨결은 그가 다녀간 이 거리에 남아있다. 문화라는 정신적 공감대 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이중섭을 기리며 그 위에 예술의 터를 잡았다.

이중섭미술관 전은자 학예연구사는 “서귀포시에서는 1996년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이자 천재화가인 이중섭을 기리기 위해 피난 당사 거주했던 초가 일대를 이중섭 거리로 명명하고, 이어 1997년 4월 그가 살던 집과 부속건물을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또 “매년 10월 말 이중섭 화가의 사망주기에 맞춰 이중섭 예술제를 개최하고, 이중섭미술관과 이중섭 공원이 설립, 이중섭 문화콘텐츠의 산실이 됐다”고 말했다.

이중섭미술관 바로 아래에는 이중섭이 세 들어 살던 초가가 있다. 담뱃갑을 싼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가족 모두가 함께한 서귀포 생활은 이중섭에게는 지상의 유토피아로 기록된다.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에서 만난 작가의산책길 유점숙 해설사는 “1.4평 남짓 작은 골방이지만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며, 찬 없는 밥을 먹고 고구마나 깅이(게)를 잡아 삶아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었지만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이제라도 되돌아가고 싶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서울사람이었던 유 해설사는 이중섭을 사랑한 제주사람이 되고, 이제는 관광객에게 이중섭 알리는 자부심으로 변해 있었다.

이중섭거리는 밤이 되면 공방의 불빛들이 문화예술의 불을 밝히고, 옛 서귀포극장에서는 젊은 음악이 발길을 붙잡는다. 이 거리에서 770m 따라 내려가면 섶섬과 문섬이 보이는 자구리해안. 부인과 5살, 3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게를 잡던 이중섭을 그리워하는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자구리문화예술공원이다.

이중섭은 이제 제주도의 새로운 역사이다. 서귀포 이중섭 거리는 자신만의 거리를 양분하며 서로 공생하는 문화와 사람이 녹아있는 곳으로 변모하고, 신화로 탄생한 이중섭은 이제 연극 영화 오페라 무용 애니메이션 다양한 장르로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쉰다.

 

“이중섭을 통한 다양한 소통, 그것이 곧 살아있는 예술혼”

이중섭 신화를 일궈낸 주인공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전은자 학예연구사

이중섭을 기록하고, 이중섭을 매개로 소통하고, 이중섭을 기획하는 작은 거인 ‘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이중섭 작 ‘통영풍경’이 통영이 아닌 제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서 통영취재진을 맞이하게 된 배경부터 소상히 소개해주는 그녀는 이중섭 콘텐츠와 웃고 울기를 함께 해온 이중섭미술관의 산 증인이다.

이중섭이 그토록 사랑한 부인 마사코 여사가 딸로 여긴다는 전 학예사는 2007년 미술관 근무로 시작, 지난 12년간 이중섭을 사랑하고 발굴하는데 혼신을 힘을 다한 주인공이다.

이중섭 관련 다양한 전시와 자료 수집 등의 미술관 학예연구사의 역할은 물론 이중섭의 따뜻한 인간미와 가족사랑, 드라마틱한 자료가 가지는 진솔한 이야기 등을 담고 관객과 소통하기에 전념하고 있다.

지역미술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 1층은 이중섭을 주제로. 2층은 창작스튜디오 작품과 지역미술가들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등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미술관을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지난 2016년 이중섭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중섭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등과의 협업 작업은 물론 전국적인 네트워킹 속 다양한 이중섭 콘텐츠 재생산에 앞장섰다.

그 결과 너무나 협소한, 그것도 제주시에서 1시간 여 거리에 있는 이 작은 미술관에 한 해 28만 명의 관람객을 부르고 이중섭거리는 서귀포의 몽마르뜨라는 별명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2022년 이중섭미술관 건립 20주년을 맞아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한 미술관 시설 확장에 나설 계획이다.

내년에는 본격적인 시설 확장 방향제시와 함께 제주도 이중섭 브랜드 강화에 전념한다는 계획이다. 제주도가 지난 10월 15일 올해 제주문화콘테츠 산업진흥의 원년으로 삼고 제주영상·문화산업진흥원과 다양한 지원정책을 통해 문화콘텐츠를 상품화·산업화하기로 선포한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전 학예연구사는 “이중섭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자도가도 눈이 번쩍 뜨인다. 통영 제주도 부산 대구 서울 등 지역별 이중섭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이중섭을 장기적인 콘텐츠로 생산하고, 지역별 특성에 맞게 신중한 개발이 필수”라고 말했다.

특히 “통영은 이중섭과 많은 예술들과의 교류, 그리고 다방에서의 독특한 전시 등을 모티브로 제주도와는 또 다른 통영만의 차별화된 콘텐츠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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