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의 이별 암울한 삶 속 부산 범일동 풍경…편지화·은지화의 위대한 탄생
2014년 부산 범일동 이중섭 콘텐츠화…이중섭갤러리, 전망대, 희망길 100계단

 

가족과의 이별 암울한 삶 속 부산 범일동 풍경…편지화·은지화의 위대한 탄생
2014년 부산 범일동 이중섭 콘텐츠화…이중섭갤러리, 전망대, 희망길 100계단
단순보여주기식 이중섭갤러리, 스토리없이 힘들기만 한 희망계단…차별화 실패


①이중섭과 창작의 활화산 통영
②예술가들이 본 통영의 이중섭
③제주도에 살아 숨 쉬는 이중섭
④부산 범일동의 이중섭 풍경
⑤위대한 유산 이중섭, 통영은 어떻게 화답할까

내가 만난 이중섭
                                         김춘수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
다고.

부산 범일동 산복도로 위 높은 석축, 담배를 문 이중섭의 부조 흉상이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걸려 있고, 그 옆 그림판에는 내가 만난 이중섭이라는 김춘수 시인의 글귀 속 이중섭은 아내를 날마다 그리워하고 있다. 부산의 이중섭은 벌써 슬프다.

이중섭은 1951년 1월 가족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을 갔다가 그 해 12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오산학교 동창 김종영의 도움으로 범일동 골짜기 뒤의 판자집 모양의 연립 빈촌 단칸방을 얻어서 생활했다. 그 시절 부산 범일동 일대에는 김영주가 이웃해 있었고 멀지 않은 범내골에 제국미술학교 출신인 송혜수(1913-2005), 임완규(1918-2003), 정규(1922-71) 그리고 박고석(1917-2002), 김경(1922-65) 등 예술인들이 살고 있었다.

부산과 제주도를 전전하는 궁핍한 피난생활을 계속됐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과 참담한 생활고로 영양실조가 된 아이들을 위해 부인 이남덕은 두 아이와 함께 부산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1952년 7월 제3차 일본인 송환선으로 동경의 친정으로 건너가게 됐다.

이 송한선이 훗날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작품활동과 전시회, 잡지 삽화 도서 표지화 드림 등의 작업을 계속하나 부산에서 제작된 수많은 작품은 대화재로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1952년 1월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의 어머니가 일본에서 생활비를 송금,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2월 장모로부터 장인의 별세소식을 받았지만 아내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이 시절 부산에서 김환기와 김병기, 백영수는 물론 통영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유강열과 전혁림, 진주의 박생광과도 조우했다. 1952년 1월 김환기, 남관 2인전, 2월 백영수 개인전과 전시장에서였다.

이중섭은 가족을 일본으로 보낸 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진실하고 귀여운 나의 남덕군
대향은 게으른 사내 같지만
우유히 강해지고 있소.
대향은 자신만만하오.
대향은 반드시 남덕을 행복하게 해보이겠소.
그대들한테로 가려고 내가 3,4일 전에 짝은 패스포트 사진이오.
이 사진에 몇 번이고 입 맞추어 주시오
                                   ㅈㅜoㅅㅓㅂ


아들 태현에게
그 새 잘 있었어요.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아빠는 태현이가 보낸 편지를 매일매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엄마가 보내준 사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편지 정말 잘 썼어요. 아빠는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있습니다. 더욱더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주세요.
                        아빠 ㅈㅜoㅅㅓㅂ


나의 사랑하는 소중한 아고라
마음에 맺힌 긴 편지 두 통 함께 보았습니다. 당신의 힘찬 애정이 전신에 느껴 남덕은 마냥 기뻐서 가슴이 가득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 나는 온 세계의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의 남덕


하지만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중섭이 보낸 편지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약 60통, 160매에 달한다. 이 편지들은 아중섭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를 연구하는 근거자료가 되는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자유자재의 글씨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이다.

가족과 헤어진 1952년 그 시절 이중섭은 '소와 새와 게'를 제작했고, 이중섭의 분신인 작품 속 소는 욕구를 분출할 길도 없이, 힘을 잃고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자조 섞인 표현으로 남았다.

이중섭이 타계한 지 만 58년. 지난 2014년 5월 범일동에 이중섭이 부활했다.

부산시 동구청이 4억6천만원의 예산으로 이중섭의 범일동 풍경거리(범일동 부산은행~마을광장 400m 구간)에 이중섭 갤러리와 희망길 100계단, 이중섭 전망대를 만들었다.

이중섭 갤러리는 모두 3곳으로 풍경거리 입구에 있는 첫 번째 갤러리에는 이중섭의 삶과 죽음을 정리한 일대기가 전시돼 있다. 두 번째 갤러리는 이중섭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이 전시돼 있다. 이중섭 전망대 아래 옹벽에 있는 세 번째 갤러리는 이중섭의 피난시절 생활과 범일동 화실 등을 재현해 놓았다.

영화 '친구'로 유명해진 구 보림극장 부근에 이중섭 거리를 알리는 입간판이 서있다. 여기서부터 이중섭 전망대까지 이중섭 거리이다.

'소설이야기 공원'에는 초량부두와 객사, 범일동 매축지 등이 소설 속에서 공간적 배경으로 나오는 이호철의 탈향, 이인직의 혈의 누, 유익서의 우리들의 축제 등 소설작품을 주제로 꾸민 소공원이다.

이중섭 작품들이 길거리 가정집 담장에도 걸렸다. 피난시절에 자리잡은 집들이 그대로 고쳐지고 다시 지어져서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봄의 아이들(1953), 구상이네 가족(1955), 춤추는 가족(1953) 순으로 작품명이 붙여진 그림들이다. 길(1953), 달과 가족(1953), 부부, 은지화가 걸려 있어 그의 예술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희망길 100계단은 계단 곳곳에 이중섭이 쓴 편지와 그의 생전 사진을 붙여 놓았다. 실제로는 180계단이 넘는다.

통영 동피랑과 서피랑 보다 더 급경사인 그 끝을 따라 올라가면 이중섭 전망대를 만난다. 마사코 전망대였다가 뒤에 이름이 이중섭 전망대로 바뀐 이곳은 연면적 33.24㎡ 규모로 지상 2층 건물이다. 1층은 주민 사랑방과 이중섭 갤러리, 2층은 전망대 등으로 구성됐다.

시원한 조망이 일품이다. 전망대에는 산복도로 송풍이란 작은 카페에 한 잔의 커피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적혀 있지만 취재차 찾은 그곳은 잠겨 있었다.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편지와 '당신의 아내'라는 답글이 전망대 투명난간에 쓰여 있다. 화가가 즐겨 그렸던 아이와 물고기로 만든 벤치에 앉아서 높은 산동네의 정취를 느끼며, 그의 예술세계와 지극한 사랑을 헤아려 본다.

생존의 끝에 선 피난민들이 산으로 몰려들어서 판자집을 짓고, 힘겹고 고단한 피난살이에서도 부산항을 내려다보면서 희망을 꿈꾸던 이중섭의 그 시선으로 부산을 내려다본다.

전망대 아래 쉼터 가는 길에는 '달과 가족'(1956)이 마중한다. 체육시설과 함께 조성된 쉼터에는 '범일풍경마루'라는 명칭을 달고 이중섭의 작품들로 옹벽을 치장하고 있다. 부산시절의 황소(1953)는 강한 울음과 외침이 메아리친다.

하지만 주택가 비탈길에 흩어져 있는 이중섭의 흔적은 그의 살아있는 예술혼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별화된 콘텐츠도 없었다.

단순보여주기식 이중섭거리 갤러리, 힘들고 가파르기만 한 희망계단은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전망이 끝내주는 이중섭전망대에서도 관람객들의 발길은 좀처럼 찾기가 어려웠다.

범일동 토박이 김성환(73)옹은 "여기서도 이중섭이 살던 곳이 여러 곳이다. 이중섭거리가 처음 생겼을때는 반짝하고 사람들이 몰렸으나 실제로는 일부러 보러 오는 이가 드물다"고 말했다.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전은자 학예연구사 역시 "부산 범일동 이중섭거리는 부산만의 이중섭 특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관람객이 참여할 콘텐츠가 거의 없다"고 아쉬워했다.

부산 범일동의 이중섭 풍경이 통영에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특색 없이 따라하면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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