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지만 촛불보다 더 평화로왔던 4.2 통영만세운동의 주역 고채주

하와이서 미주독립운동 앞장, 조국독립 위해 밀입국
통영향교 장의(掌議)로 민족의식 고취, 4.2만세 주도
제4차 만세 중앙시장 장날 3천여 명 "조선독립만세"
58세 고령에도 물대포 맞으며 경찰서 행진 최일선
이학이·허장완과 함께 3열사, 군민성금 장례와 묘비


 

우러러 가장 드높은 것은 우리들 사랑의 정신이요,
보다 드넓은 것은 우리들 평화의 이념이다.
다시 없이 값진 이 사랑, 이 평화는
한 때 우리들의 조국과 함께 짓밟혔다.

은혜를 원수로 대하는 자에게 사랑으로 갚음하고,
무기를 흉기로 둔갑하는 자에게 평화의 참뜻으로 깨우치던 일,
이것이 곧 우리들의 삼일운동이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한 숭고한 이념 앞에
모든 종교, 모든 사상, 모든 파벌도 오직 하나
사랑의 정신으로 뭉치었다.

그리하여 더러는 순교하고 더러는 옥고를 치루고
또 더러는 망명도 하였다.

이 거룩한 기록 위에 빛을 보탠
내 고장 뜨거운 지사들의 이름이 있다.

이들의 매운 절개와 꽃다운 마음을
돌에 새겨 먼 훗날 증거코자 하오니
다시금 모진 풍우에도
견디어 끝내 꺾이지 말자.
<원문공원 3.1운동 기념비>

19세기 당시 통영은 지금과 다름없이 남해안의 어업 전진기지였다.

1899년부터 일본 어업민의 이주로 집단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통영 어시장의 해산물 가공, 생산, 유통을 장악, 지역 어민과 상인을 수탈해 왔기에 반일감정이 크게 고조돼 있었다.

통영의 3.1만세운동은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총 4차 6회 3천700여 명의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주축이 돼 차츰 각계각층 시민들이 참여했다.

대부분 장날을 이용, 통영 읍민과 인근 농어민들까지 동참, 시위 규모가 확대돼 당시 통영시민들의 독립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4차에 걸친 만세운동 중 4월 2일 장날 현 통영 중앙시장에서 열린 통영만세운동은 통영항일운동의 최절정에 달한다.

그 주역들은 과연 누구일까. 대표적인 지도자 한명을 손꼽으라면 고채주(高采主·일명 고석주·1861-1920)이다.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 통영 부도정시장(현 중앙시장) 4.2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이다.

1861년 11월 5일 통영면 도천동에서 고제신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통영대표의 조선시대 한학자 고영진의 후손으로, 통영을 한시로 노래한 그 유향팔선 중 고재신과 조재경의 대를 잇는 직계 후손이다.

일찍이 한학을 익히고 고향에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1902년 12월 42세의 나이로 제물포(인천)에서 동포 120여 명과 함께 제1차 하와이 이민선을 탔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도미(渡美)한 이유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국의 현실을 걱정하면서 힘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발달된 서양문물을 배우고 익혀 동포들을 널리 깨우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달 동안의 긴 항해 끝에 닿은 약속의 땅 하와이는 그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사탕수수 파인애플 커피 농장에서 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처참한 생활 속에서도 막가월리 농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한인 교포들을 규합했다.

1906년 2월 미국 상원에서 동양인이민반대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많은 동포들이 하와이로 이주해왔고, 그는 동포들의 간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그해 송건 홍정표 이묵원 등과 함께 자강회(自彊會)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했다.

또 하와이에서 23개의 교포단체가 난립하는 것으로 보고 이듬해 호놀룰루에서 '한인합성협회'로 통합하고, 합성신보(合成新報)를 발간했다.

1908년에는 하와이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를 통합, 국민회의 산파역을 맡았다.

1909년 국민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밀명(密命)을 띠고 귀국, 고향 통영에서 통영향교의 수장인 장의(掌議)로 활동하고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4.2 통영만세운동의 주역 고채주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고석윤 통영 3.1동지회 회장. 고채주 선생이 수정한 통영의 독립선언서 '동포에 격하노라'를 펼쳐 보이고 있다.

고채주의 후손인 고석윤(68) 통영 3.1동지회 회장은 "당시 증언에 따르면 고채주 독립운동가가 귀국한 것은 통영향교 장의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무엇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주의 국민회와 상하이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책으로 군자금 조달 등 지하운동을 펼치기 위함이었다"라고 말했다.

또 고 회장은 "고채주 할아버지 뿐 아니라 당시 미곡상을 하고 있던 고채주의 부인인 장씨 할머니도 일경의 눈을 피해 군자금 전달에 앞장, 현재 현충원 국립묘지에 합장돼 계신다"고 설명했다. 

통영 만세운동의 출발은 1919년 3월 8일 경성 배재고에 재학 중인 진평헌이 귀향, 3월 13일 장날을 기해 진평원, 권남선, 양재원 등 19명의 청년들이 거사를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일본인의 밀고로 10일 새벽 일본 경찰에 발각, 주모자 모두 체포, 투옥된다.

고채주는 진평헌 격문작성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고석윤 통영 3.1동지회 회장이 보관하고 있는 고채주 소장본 '동포에 격하노라'는 여기저기 자필 수정한 흔적이 뚜렷하다.

고채주는 앞서 못다한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하고, 3월 26일 강윤조, 김영중, 박상건, 김두옥 등과 은밀히 만나 4월 2일 만세운동을 결의했다.

4월 2일 부도정 장날을 D-데이로 정하고, 지역별 책임자를 정하고 군중동원에 만전을 기하는 등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연락을 받은 최부근은 이튿날인 3월 27일 이석용, 장근숙 등과 박남홍의 집에 모여 결의를 곧게 한 다음, 이 사실을 알리는 결의문 1천여 매를 동사해 인근 주민들에게 비밀리에 돌렸다.

드디어 4월 2일 오후 3시. 4∼5천명(판결문에는 약 3천명 기록)의 장꾼이 모여 들었다.

고채주와 강윤조가 시장 한 가운데 가장 높은 단 위에 올라가 한손에는 결의문을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두 팔을 활짝 펴 올려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했다.

호응한 군중들도 일제히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부르니, 상인들도 재빨리 문을 닫고 만세대열에 참가했다. 시장입구인 통영우편소에서 통영경찰서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이들은 독립만세를 열창하며 군중들과 함께 통영경찰서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3월 8일 훈방된 배재학당 학생 박상건(당시 17세)이 경찰서에서 맞은 장독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거리로 뛰어나와 전에 수학했던 관란재(觀欄齋)의 10대 20여 명을 동원,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수기를 높이 흔들며 대열에 앞장섰다.

이에 당황한 경찰과 헌병은 총칼을 휘두르고 저지했으나 만세대열을 막을 수 없자 소방대를 출동시켜 군중에게 물을 퍼부었다.


하지만 고채주는 가슴으로 물을 받으며 오히려 모자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연창하니 만세운동 참가자들도 합세, 물줄기를 뚫고 나아가 그 열기를 더해갔다.

이날 시위에는 예기조합 기생 33명이 금비녀와 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동참했다.

정홍도, 이국희는 이날 오전 10시 길야정 예기조합에서 다른 동료 5명을 불러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며 기생단을 조직, 금비녀와 금반지, 팔찌 등을 팔아 장의용 핀과 짚신과 광목 4필반을 구입, 소복 치마저고리 33벌을 만들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오후 3시반 모두 소복으로 갈아입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여매어 태극기를 들고 예기조합에서 출발, 중앙시장 우편국 앞을 지나 시장 복판을 만세 대열에 동참했다.

당시 재판 기록에 따르면 "동일 부도정 시장 하라다(原田) 상점 부근에서 만세소리가 나, 이를 듣고 즉시 그 장소로 가보니, 피고 등의 기생단은 하라다상점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통영경찰서로 향해 나아가자 약 3천여 군중이 합세하고, 이에 남녀 두 집단이 뇌동(雷同)하여 남자는 모자를 여자는 치마저고리로 통일하고, 열광적으로 만세를 절규하여 소요가 극에 이르고, 기생단 7명은 열광적 힘으로 군중의 최선두에 서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일경 3명이 보고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치열했지만 촛불보다 평화로웠던 만세운동은 총칼과 물펌프 앞에서 군중은 해산되고, 선두에 앞장섰던 고채주, 강윤조, 박상건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김영중도 며칠 뒤에 검거됐다.  

이들 4명은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대국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됐다. 결국 고채주, 강윤조, 김영중은 징역 1년, 박상건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또한 정홍도와 이국희 역시 각각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출옥했다.  

고채주는 이후 고등법원에 항고했으나 그 역시 기각됐다.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고채주는 59세의 고령에 모진 고문과 형벌로 몸이 망가져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20년 5월 12일 순국했다.

하지만 일제는 병보석으로 고채주를 석방할 때도 "집안의 다른 이로 그 형을 대신한다고 못을 박아 고채주의 맏형이던 고병주의 장남 고광훈이 대신 남은 옥살이를 했다"고 3.1동지회 고석윤 회장이 증언했다.

그가 순국하자 군민들의 애도 속에 엄숙히 장례를 치르고 봉평동 묘지에 안장했다.

3열사인 이학이, 허장완, 고채주의 장례는 통영군민과 유지들의 성금으로 치르고 3열사 공히 같은 규격의 오석(烏石)을 다듬어 앞면에는 '조선 000之墓'라고 새기고 뒷면에 그들의 업적을 간략히 새긴 묘비를 세웠다.

하지만 뒷면 부분이 일경에 의해 훼손, 판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묘비도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1970년대 향토사학자인 김문한 옹이 3열사 묘비를 모두 찾아내고, 1986년 3열사의 만세운동 자료수집가 옥사 경위, 묘비 등을 탁본, 3열사의 구국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독립기념관 등에 자료를 보냈다.

동시 원문공원 3열사 묘비이설 추진위원회를 구성, 337명의 연대 서명을 받은 후 묘소 성역화 작업으로 지금 3.1기념탑 앞 3열사비(실제로는 허장완 열사 유족 반대로 고채주, 이학이 열사 묘비만 있다)가 서 있다. 

국가는 고채주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고석윤 통영 3.1동지회 회장은 "고채주 독립운동가는 우리 집안만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통영의 역사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반짝 조명을 할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항일 역사자료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세대가 더 흘러가기 전에 집안의 큰 어르신이었던 고영진 진사로부터 고채주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의 자료를 정리, 통영시민과 학자들이 공유할 수 있게 통영시에 기증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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