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정 군자금 비밀결사조직 통영혈성단의 여병섭

경남 고성에서 출생한 여병섭은 청년시절 예수교에 입교하고 1915년 평양신학교 입학했다.

1916년 고성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고, 평양신학교 3학년 때인 1917년 3월 3일 고성교회 장로가 되었다.

그는 평양에서 숭실학교(崇實學校)와 평양신학교(神學校) 재학생을 비롯 졸업생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 조직에 가담하고 청년단지(靑年團誌)를 발행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미주(美洲)국민회(國民會)의 박용만(朴容萬)과 연결하여 국내외(國內外)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고 전(全)민족적 결사조직으로 발전시켜서 결정적 시기에 독립전쟁을 통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죽을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1917년 3월 23일 평양 이보식(李輔植) 집에서 장일환(張日煥)·배민수(裵敏洙)·백세빈(白世彬)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결성하고 동참했다.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가 지방에 지부 조직을 확대할 때에 노선경(盧善敬)은 황해도 구역장, 강석봉(姜錫奉)은 전라도 구역장, 여병섭(呂炳燮)은 경상도 구역장으로 활동했다.

1918년 초에 조선국민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주요 구성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조직이 와해되었다. 그는 피체되어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12월에 고성교회 장로직분을 사임함으로 교회당회가 폐지됐다. 통영선교부 왕대선 선교사는 여병섭 장로를 진주광림학교 교사로 추천했다.

3·1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1919년 4월 호주선교회 진주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진주광림학교(光林學校)에서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비밀결사조직 혈성단이 결성됐다.

단장은 광림학교 교사 홍수원(洪秀瑗), 단원은 진주교회 목사 박성애(朴晟愛), 통영대화정교회 장로 여병섭(呂柄燮), 거창교회 전도사 고운서(高雲瑞), 정성도(鄭聖道), 김정수(金禎洙), 강성화(姜性化) 등이었다.

처음에 단장 홍수원(洪秀瑗)을 중심으로 회원 모집과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여병섭은 조직책(組織責)이었다. 이후 단원이 30여 명이 되어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해 8월 평양신학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열렸다. 조선장로교회 인사들은 기독교인들을 결집해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해서 조국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 아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은 평양에 본부를 두고, 지방에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때 혈성단원 박성애(朴晟愛) 목사가 장로회 총회를 다녀온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10월에 혈성단을 대한국민회 경남전도회(慶南傳道會)로 항일비밀결사조직을 개편했다.

12월에 마산에서 열린 성서연구모임(査經會)에서 통영(統營), 거창(居昌), 남해(南海)로 조직을 확대했다. 임원은 회장 박성애(朴晟愛), 회계 강성화(姜性化), 평의원 홍수원(洪秀瑗) 등 이다.

거창에서는 거창교회 오영선 장로, 고운서 전도사, 주남선 전도사 등이 혈성단원으로 활동했고, 통영혈성단원은 대화정교회 여병섭 장로를 중심으로 욕지교회 강상은(姜尙殷) 장로, 고성교회 최상림 전도사, 배익조 등이 활동했다.

1920년 대한국민회 경남전도회는 상해로 피신한 박승명을 통해 각 지회에서 모금한 자금을 송달하고 대한국민회 기관지 대한민보(大韓民報) 1,500부를 인수했다.

통영지회로 조직된 통영전도대는 대한민보를 통영, 거제, 고성 지역교회를 통해 각지에 배포하고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 때 통영혈성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사무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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