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춤 ‘승전무’의 원형 한정자 인간문화재
1996년 승전무 예능보유자 지정…전통춤 계승 노력

통영 태평동에서 태어나 오로지 고향에서 승전무와 우리 춤 보급에 힘쓴 승전무 예능보유자 한정자(79) 선생.

승전무는 임진왜란 때 장졸들의 사기를 북돋우거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추어졌고, 싸움에 이긴 뒤에는 승전축하로 추었던 역사 깊은 춤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인간문화재 한정자 선생은 오랜 세월 승전무에 평생을 바쳤다.

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방방곡곡을 찾아다닐 정도로 춤은 한정자 선생의 원동력이 됐다. “춤을 추고 있을 때는 몸이 고되고, 밥을 안 먹어도 힘이 샘솟고, 배가 불렀다”고 말하는 한정자 선생은 특히 지역 고유문화 계발, 보존, 전승 및 선양은 물론 각 대학에서 승전무 강의를 펼쳐 후학 발굴에도 앞장서 왔다.

1962년 제1회 한산대첩축제 때부터 현재까지 매년 공연부문에 참가하면서 예술을 알리고 있다. 1회 축제에는 20살의 나이로 무대에 올라 창작무용을 선보여 시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현재까지도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으로 통영 예술의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통영 무형문화재보전협회 이사장으로 공예와 예능 분야의 화합과 지역 예술가들의 권익 보호에도 힘쓰고 있다. 전문기관이 부족했던 지역에서 춤 예술 전수에 평생을 헌신한 한정자 선생은 지난달 28일 제15회 통영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한산신문은 평생을 춤과 함께 한 몸으로 살아온 한정자 선생에게 그의 70여 년 승전무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제15회 통영시 문화상을 수상하셨다. 축하드린다. 수상소감은.

항상 해왔던 춤을 췄을 뿐인데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 오랫동안 승전무를 잘 지켜왔다고 통영시에서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승전무는 제가 여태까지 한평생 지켜온 것이다. 춤이 있었기에 제가 이렇게 살아있고, 그 춤을 지킬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나는 춤을 지켜야 하고, 춤을 춰야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포기해 버린다면 이걸 누가 지켜주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졌다. 제가 오늘날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춤이다. 승전무가 나고, 내가 승전무다. 앞으로도 이 마음 고스란히 간직해서 승전무를 지켜나갈 것이다. 그 어디든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제겐 행복이다.

선생님께서는 승전무 보존 및 전수 교육에 깊이 기여하고 계신다. 춤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춤에 대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주 어렸을 적이 떠오른다. 1년에 한두 번 통영에 오는 창극단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항상 할머니 손을 잡고 공연을 보러 갔다. 제일 첫 줄에 앉아서 공연을 봤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공연을 봤다. 어린 나이였지만 속으로 ‘나도 저렇게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춤을 배웠던 것은 유치원을 다닐 때다. 당시 우리 집은 할아버지께서 어장을 하던 선주의 집이었다. 집이 넓고, 다다미방이 있는 이층집이었다. 동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다다미방에 모여 우리끼리 ‘유희(무용)’를 하고 놀았다. 유치원에서 배웠던 동작을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놀았다. ‘아리랑’, ‘도라지’, ‘노들강변’ 같은 노래였는데, 이 민요에 맞춰서 춤을 췄던 기억이 있다. 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가족과 동네 어르신들을 초청해서 친구들과 연습했던 춤을 보여드리곤 했다. 당시는 놀이로 생각하고 춤을 췄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레 춤에 관심이 생겼다. 통영에는 교습소가 없었고, 춤을 가르쳐 주는 곳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방학 때가 되면 열리는 강습회에 꼭 참석했다. 서울·부산에서 무용선생님이 통영에 내려오셔서 춤을 가르쳐 주셨고, 친구들과 함께 춤을 배웠다.

 

승전무 예능보유자였던 故정순남 선생께 사사한 후 평생을 승전무 보전과 발굴 계승에 헌신했다. 승전무를 처음 만났던 순간은.

춤을 좋아하다 보니 스무 살 무렵부터 통영에 무용교습소를 열어 후배들,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쳤다. 무형문화재를 한창 발굴할 당시 진주검무가 1967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통영에서도 무형문화재를 발굴하기 시작하면서 저도 함께 발굴에 동참했다. 통영에는 예능인과 악사를 양성 관리했던 교방청이 있었고, 마지막 기녀였던 정순남 선생님이 계셨다.
당시 복원에 적극적으로 함께 했던 엄옥자 통영여고 교감 선생과 함께 승전무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순남 선생님을 찾아가 춤을 배울 수 있도록 부탁하고 설득했다. 기녀라는 신분을 숨기고 살아온 정순남 선생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설득을 통해서 춤을 배울 수 있었다. 춤동작을 그대로 재연하면서 손가락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를 배우며 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엄옥자 선생이 통영여고 무용반 학생들과 학술적으로 복원했고, 저는 교습소에서 정순남 선생님과 아이들과 함께 복원작업에 돌입했다. 승전무는 1968년 통영북춤이 국가무형문화재(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 이후 1987년 통영칼춤을 포함해 재지정 되면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저는 1996년 승전무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다.

 

통영에서 한산대첩축제부터 문화재야행, 예술제 등 다양한 행사와 국가행사에 참여하고 계신다. 고향 통영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결혼 후 1년간 대구에서 살았지만 바로 고향 통영으로 다시 내려왔다. 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춤에 대한 그리움이 뿌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가족, 지인들도 통영에 있었다. 평생 통영에서 교습소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제자들이 커가면서 보람과 성취감이 컸다. 승전무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고, 이와 더불어 제자 양성을 해야 한다는 각오가 있었다. ‘내가 통영을 떠나면 누가 춤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10월 9일 문화재야행, 10월 18일 제50회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정기 발표공연을 펼친다.

문화재야행과 제50회 정기 발표공연은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문화재야행은 세병관 마당에서 공연이 펼쳐지며, 기방입춤, 권번(바람이 분다), 칼춤, 혼란(일본, 태극기), 북춤, 수건춤, 아리랑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제50회 국가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정기 발표공연에는 ‘각로청수 속에 춤을 그리다’라는 주제로 승전무 북춤, 김평호류 소고춤, 엄옥자류 수건춤, 동래덧배기춤, 승전무 칼춤이 펼쳐진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승전무의 미래, 승전무를 배우는 교육생들에게 당부의 말씀은. 그리고 선생님께서 앞으로 펼쳐낼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서.

결석하지 않고 착실하게 배우는 것이 좋다. 춤에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보니 중도탈락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은 대학졸업생들도 있고, 여러 선생님과 지부도 생겨서 제자들이 많이 생겼지만 끝끝내 못해내는 사람들도 아직 많다. 열심히 배우다가 그만두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문화재를 지키는 소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마스터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춤을 추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저세상을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춤을 추기 위해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몸이 고되고, 밥을 굶어도, 춤을 추고 있노라면 늘 배가 불렀다. 제 평생의 원동력이 바로 춤이다. 춤만 출 수 있다면 그 어디든 좋다.
예전에 욕지도를 비롯 찾아가는 섬 공연을 펼친 적이 있다. 공연 도중에 비가 내려서 한복에 물이 들었는데 관객들이 즐겁게 공연을 보는 모습에 행복했다. 대통령 취임공연이나 전국 공연, 도서지역 공연 등 그곳에 어디든지 춤이 있는 곳, 춤을 출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그저 좋다. 통영인이라면 누구나 승전무를 배워서 출 수 있는 장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우리가 죽고 없어도 후손들이 승전무를 물려받아 영원히 우리 춤이 남아있길 믿고 있다.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