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문화원이 주관하여 개강한 제 10기 문화학교 여러강좌 중 통영 향토사 강좌를 접수했다.


 지난 3월 27일부터 시작하여 6월 12일에 제11일차 교육을 끝으로, 6월 26일 수료식 및 작품(교육과정) 전시회를 시민문화회관에서 전통무용, 한국화, 서양화, 서예, 한지공예, 야생초 가꾸기, 향토사 등을 수료결과를 다양하고 모양새 있게 발표함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단순히 통영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한번 들어 보고자 출석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통영 살면서 통영의 역사(그 시작의 뿌리)를 아시는가? 아마도 자료(사료)에 의해 옛 삼한시대에는 변진 12국 중 고자미동국, 가야시대는 소가야, 신라시대는 고자국에서 고성군으로, 고려시대는 거제현, 조선시대 와서 두룡포, (고성군)춘원면, 진남군, 용남군으로, 일제강점기시 통영군과 통영읍, 광복이후 오늘날에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영시로 통합되는 과정까지 밟아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늘날의 통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도시의 기틀은 통제영 관내(현재는 세병관 들어가는 외삼문 '망일루'와 내삼문 '지과문' 사이 우측에 위치)에 있는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이 비는 1604년(선조37)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두룡포)로 옮겨 설치하게 된 경위와 그의 치적을 새긴 통영의 사적비이다 할 것이다.


 그 내용 일부를 보면-통제영은 처음 한산섬에 있었는데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멀어서 고성으로 옮겼는데 배를 숨기는 데는 편하였으나 변을 당하는 데는 불편하였다. 공이 통제사가 됨에 미처 개연히 마땅한 땅을 측정하여 진영을 두룡포로 옮기게 되었다. (중략)


 두룡포가 옳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한낱 소금기가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닷가 항구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잡초 우거진 언덕으로 몇 천만년 동안 몇천 몇백 사람들을 겪어오다가 비로소 공의 손에서야 이루어 졌다.(중략)로 돼 있다.


 통영에는 일제강점기 기미 만세사건으로 옥사한 고채주, 허장완, 이학이 3열사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역사를 되돌아보는 신문기사 등에서도 많이 보아서 알 것이다. 그러나 통영에는 세 효자, 효부, 열녀, 즉 효자 박지순(생가), 효부 함안조씨(정문집), 열녀(해평열녀 사당), 등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또 우리 통영이 낳은 박경리 선생이 한국의 대표적, 아니 세계적 소설가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초기에는 시 작품으로 시작한 시인이기도 하다는 것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분의 '서문안 고개'라는 시는 당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서문 안 고개와 어머니를 그리며, '판데목 갯벌'이라는 시는 판데목의 옛 풍경을 그린 서정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한국 현대시 10인 중 한사람이며 시집 '사슴'을 발표하여 개성있는 시인으로 사랑받은 시인 백석(白石 본명: 기행, 평북 정주 출생, 오산중학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 졸업)이 통영 여인을 흠모하여 '통영'이라는 제목의 시 3편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뿐인가 통영에는 죽림리에 통영향교가 있는 줄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나 도천동에 백운 고시완(1783~1841)선생이 백운서재(白雲書齋)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이들이 통제영 군점 수조 행사 구경을 하고 싶어 하자 연못에 도술을 부려 행사 장면이 비춰 보이도록 했다는 전설이 있고, 백운암 유고집이라는 문집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또 평림동 우럭개 마을의 이름유래는 옛날 마을 포구에 우럭이 조개가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마을에는 영감장승과 할멈장승의 전설과 함께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木)장승 중 하나로 남아 있어 역사(고고)학 연구가에게 사료로 남아있는 별닷거리(별신굿을 할 때 꼭 대기에 새가 있는 솟대를 세우고 메구 놀이를 하고 다닌 거리)도 밟아 보았다.


 충렬사 수조도(당시 해군이 수상 조련하는 그림)이나 사료에 의하면 군점(군사점호)시 동원되는 배는 거북선 43척 전선 548척 군사 3만6천명 정도의 규모 였다고 하니 당시 통영의 인구는 한 3만명 정도로 치면 오늘날에는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볼 것이다.


 사실, 향토사 공부를 한다고 하니 혹자는 그것 해봐야 통영사람 누구 집 밥그릇, 숟가락 몇 개이고 어떻고 하면서 남의 집안 내력이나 험담(속되게 표현해서)깔발리고 폄하하려는 소리만 하는 것 아니냐 하며 부정적 시각(편견)을 가지신 분들도 몇 몇 있었다.


 그러나 (요즘 지자체 기초의원 정도만 출마해도 공인이라고 집안 내력 학력 이력 재산정도 심지어는 개인 사생활까지 다 들어내는 판인데) 역사적 인물에 대한 부모나 그 시대상에 비쳐진 생활 정도는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도 본 과정 중 일부 중복 설명되는 부분이 있지만 약480 포인트(역사, 지명, 건축물 등 물체, 인물 들을 설명(교육)하는 하나 단위를 포인트로 지칭) 가운데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28포인트 전체의 약 6%로 밖에 안되며 그나마 그분의 집안사정을 참고 설명한 인물은 10여 명에 불과하며 그분이나 그집안을 험 잡거나 폄하려 한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통영에 사는 사람이라면 애향심의 발로이나 하는 거창한 말을 떠나서 내가 사는 고장의 역사는 어떻고 내 고장에는 어느 곳에 어떠한 사건(역사)의 향기가 묻혀있는가 한번쯤은 살펴 볼만한 일이 아닌가.


 강좌 내내 열과 성을 다하여 알으켜 주고 안내하여 주신(통영 향토사에 대하여 30여 년을 고서적, 사료, 웃어른 들 이야기 등을 공부하고 참고하며 지금도 보완하거나 미처 몰랐던 사료에 대한 공부와 도시개발로 멸실될 가능성 있는 사료(자료) 사진으로 남겨두는 등 향토사 공부에 끈을 놓지 않는) 통영 향토역사관장 김일용 선생님, 다소 수줍은 듯 조용히 진행보조를 열심히 맡아준 여직원, 적절히 흥을 돋우어 가며 산발적 공부가 안되도록 애쓰신 우리 반장(회장) 친구야!(이 강좌에서 처음 만나 친구로 되었음), 70하고도 서넛해를 넘기신 노구(?)에도 젊은이에 빠지지 않고 쭉 함께하신 대선배님, 순간순간에 자기 아는 상식 곁드려 가며 수강생 아듬으려고 애쓰신 선배님, 직장일이나 살림살이에 바쁜 시간 쪼개어 출석하여 주시고 그때그때 마다 활력소가 되어주신 젊은 엄마들(여학생님) 모두모두 큰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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