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둘 곽숙희 할머니의 여고시절…"영화 '써니'가 딱 우리 얘기, 돌아갈 수만 있다면…"

▲ 그리운 여고시절을 추억하며 해맑게 웃는 곽숙희 할머니.

아담하고 귀염상이던 숙희는 '오무짜', 시도 때도 없이 방귀를 뀌던 재민이는 '방구', 미선이는 유난히 말이 많다고 '씨태'라 불렀다.

쇠갈쿠리가 주렁주렁했던 철물점집 영미는 '갈쿠리', 국기사집 딸 국자는 '국기사', 동무 중 유일하게 안경을 썼던 '안경잽이' 명숙이까지, 이렇게 여섯이 모여 '뻘따이'가 됐다.

"섬머슴아 같은 개구쟁이를 통영말로 '뻘따이'로 한다 아이가. 어찌나 유달았던지. 우리 여섯이 딱 그랬거든. 그래서 계모임 이름을 그걸로 지었어. 그땐 충무시내를 휘젓고 다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하고 빛났던 순간이 아닌가 싶어. 지금 이 나이되니까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

올해 예순둘의 곽숙희 할머니. 40년 전 여고시절, 뽀얀 피부에 인형처럼 귀엽고 예뻐 오무짜라고 불리던 소녀가 바로 할머니다.

"뻘따이 이야기를 글로 쓰면 시리즈로 몇 부작은 족히 될 걸? 얼마 전 우연찮게 영화 '써니'를 봤는데 딱 우리 여고시절이더라. 돌아 갈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노".

할머니는 항남동 남망상공원 입구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다섯 친구들 역시, 옆집 건너 옆집에 살았다.

"사실 넷은 우리 동네고 둘은 옆 동네였어. 그렇다고 멀리 있는 건 아니고 한 명은 지금 제일은행 주변, 다른 한 명은 옛날 통영경찰서 주변에 살았지. 팬티만 입고 동네 울러 댕길때부터 놀던 친구들이야".

여섯 친구 모두 통영초등학교, 통영여자중학교, 통영여자고등학교를 다녔다. 써니의 칠공주가 그랬듯 뻘따이 육공주도 뭐든 함께했다.

"학교 같이 가는 거야 기본이지. 지각도 같이하고 한 명이 조퇴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여섯이 같이 조퇴했어. 오죽하면 결석도 같이, 방학숙제도 똑같이 베꼈다니까. 또래는 물론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어. 덕분에 선생님들한테도 야단도 많이 맞았지".

학창시절 뻘따이의 등굣길 필수 아이템은 사복이었다. 언제든, 어디로든 놀러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밤 12시 통금시간이 있던 시절이었지만 자정을 넘기기가 예사였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 한번은 재민이네 2층에서 하얀 소복입고 물 떠놓고 소원을 빈 적도 있다.

"컨닝한 거 안 들키고, 겐또(찍은 문제들) 친 거 맞게 해달라고 한적도 있다"고 했다. 뭉치면 거칠게 없었던 뻘따이의 전성기는 여고시절이었다.

"여고 다닐 때 까지만 해도 다들 집안 형편이 괜찮았어. 주머니도 넉넉했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계모임이야. 모임 장부를 만들어 조금씩 돈을 모았어. 그걸로 놀러가려고. 실제로 그 걸로 많이 다녔어. 남진, 나훈아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쑈'도 보러가고. 할 게 없을 땐 '희락장'에 갔지. 오행당 골목안에 있던 고깃집인데 흰 교복입은 여고생 여섯이 떡하니 자리잡고 고기 구워 먹는다고 생각해봐. 기가차지? 그런데 그 땐 부끄러운 줄도 몰랐어. 마냥 좋았지. 한번은 곗돈 장부를 돌리다 선생님한테 걸렸어. 지금도 이름이 기억나 '석대진' 선생님. 이후 선생님은 우리만 보면, '아이고 우리 계주님들 이번 달엔 어디로 놀러 가시나?'며 놀렸어. 그 선생님도 한 번 보고 싶네".

셀 수 없이 많은 추억의 조각을 남긴 여고시절. 하지만 그 순간을 지나면서 뻘따이의 전설도 차츰 빛을 잃어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저마다 제 살길을 찾아 흩어졌어. 연락도 하고 가끔 만나기도 했지만 예전만 못했지. 나도 그랬고".

할머니는 20대 초반,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할머니가 서른여덟 되던 해 갑작스레 남편을 떠나보내야 했다. 두 딸과 생계가 오롯이 할머니의 짐으로 떠안겨졌다.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시작한 게 식당이었다. 부족함 없었던 유년시절, 자존심이 강했던 할머니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어릴때 아버지가 순경(경찰) 이셨어. 나중엔 새마을금고 이사장까지 하셨지. 부유했던 가정이 한 순간에 밥벌이를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된거라.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그래도 어쩌겠어. 자식들이 있는데... 그런데 유독 친구들한텐 보이기 싫어서 문을 걸어놓고 장사를 했어".

음식 솜씨가 좋았던 할머니 덕분에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맛깔나는 요리를 곧잘 만들어냈고 다행히 식당은 자리를 잡아갔다. 두 딸도 무던히 자라줬다.

그러던 2010년의 어느 날 새벽녘,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방구' 재민이었다.

"내 기억에 마지막으로 본 게 꼬박 20년 전이었던 것 같아. 사실, 전화 받기 전 까지 난 재민이 잊고 있었어. 밥벌이 한다는 핑계로. 식당일 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데 재민이는 잊지 않았더라고. 서울로 시집간 뒤로 연락이 끊겼는데 시청, 동사무소를 수소문해서 날 찾아다 했지. 그 얘기 듣고 너무 미안했어. 잊고 지내서".

생업에 치여 잠시 접어뒀지만 되뇌어 보면 할머니의 기억 속에 가장 깊이 각인된 친구가 재민이었다.

"난 엄마가 누군지 모르고 나고 자랐어. 엄마의 정이 늘 그리웠는데. 재민이 엄마가 내게 너무 잘해주셨어. 입버릇처럼 '재민이 보내고 우리 숙희도 좋은데 시집보내야 하는데'라고 하셨지. 엄마가 없던 난 그냥 '엄마, 엄마'하며 따랐어. 덕분에 재민이와 너무 친했어. 20년 만에 전화 받고 나서야 그 기억들이 되살아났지".

때 마침,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할머니에게 추억 속 '베스트 프렌드'는 또 다른 삶의 빛이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울증이 왔던 것 같아. 사기도 당하고 종업원한테 배신도 당해서 정말 죽고 싶던 순간이었는데 재민이가 찾아 온거라. 하룻밤 같이 보내며 참 많이 웃고, 많이도 울었어. 뒷날 보내면서 다음에 '뻘따이' 한 번 뭉치자고 약속하고 보냈는데...."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굵게 모여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으로 '툭'하며 떨어졌다.

▲ 먼저가 친구들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몇 달 뒤, 딸 애리한테서 전화가 왔어. 엄마 돌아가셨다고. 전에 왔을 때 암에 걸렸는데 다 나았다더니. 그게 아니었나봐. 마지막 가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었나봐. 올해까지 두 번 기일을 보냈으니 벌써 3년 전이네".

이제는 살아생전 만날 수 없는 먼 곳으로 간 친구지만 그래도 꿈에선 가끔 찾아온다고 했다.

"한 번은 나더러 병원에 꼭 가보라 하데. 이상하다 싶어 자주 가는 병원에 갔는데 별 이상이 없다는 거라. 갸웃하며 나오는데 맞은편에 새로 생긴 병원이 있어서 혹시나 해서 종합검진을 해 봤지. 그런데 며칠 뒤 암이라고 통보가 왔어. 위암.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라며 얼른 치료를 하자더라고. 다행히 지금은 완전히 나았어. 재민이가 살려준 셈이지".

이제 남은 뻘따이는 할머니를 포함해 셋 뿐이다.

"잘된 친구도 있고, 힘들게 살다 먼저가 친구도 있지. 씨태 미선이는 서른 청춘에 애 둘 낳고 제일 먼저 갔어. 그 다음 재민이, 또 이듬해 영숙이가 교통사고로 떠났어. 살아있으면 또 만나고 할 텐데. 생전에 뻘따이로 손잡아 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

너무나 즐거운 추억들로 채워진 할머니의 학창시절. 기억의 단편들이 머리 속에 박혀버린 지금, 할머니는 그 때 친구들 너무 그립다. 하루는 혼자 집 앞 바닷가에서 실컷 울고 오기도 했다.

"할 수 있다면 옛날로만 살고 싶다"는 할머니지만 지금을 살아야 할 이유도 있다.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녀석이다.

▲ 숙희 할머니가 아직 생존해 계신 재민 할머니의 어머님께 띄우는 편지를 쓰고 있다.
"학장시절만 놓고 보면, 재밋고 행복했던 게 95야. 슬픈 건 5뿐이지. 그래도 새벽 5시쯤 일어나 창밖을 보고 먼저 간 친구들 이름 하나씩 부르며 혼잣말을 해. '나는 지금 안 갈란다. 손자랑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고...".

학창시절 책 읽고, 글쓰기를 참 좋아해 백일장에 나가 상도 곧잘 타 왔던 할머니. 얼마 전 우연찮게 편지글쓰기 공모전 소식을 듣곤, 그때의 추억을 담아 재민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끄적끄적' 써 내려갔다.

2012 독서의 해를 기념해 새마을운동 단체에서 마련한 '대통령기 제32회 국민독서경진대회'였다.

애쓰지 않아도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는 학창시절의 그리움, 그 시절의 추억을 담담히 담아낸 할머니의 5장 편지는 심사위원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고 편지글부문 일반부 최우수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짧을 할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숙제가 하나있다.

"재민이 엄마가 아직 살아계셔. 올해 아흔 중반 즈음 되셨을 거야. 엄마도 참 박복하셔. 자식 셋이 모두 먼저 갔거든. 지금 창녕에 계신다고 얼핏 들었는데. 여고 졸업하고 한 번도 찾아뵙질 못했어. 엄마가 나한테 해주신 거 생각하면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잊고 지낸 세월이 죄송스러워 그러질 못했어. 그래도 죽기 전에 꼭 한 번, 찾아가 봬야 겠지? 그럴려고.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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