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최초의 커피는 누가 마셨을까?

늦가을의 스산함이 낙조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애잔하게 밀려오는 오후.

절로 따뜻한 커피가 생각난다.

별별 커피가 즐비한 요즘, 커피는 이미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지 오래다. 그럼 통영의 커피 문화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그 비밀을 함께 풀어보자.

통영에서 커피의 기원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김치몽이란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김치몽은 1857년 1월 12일 경남 통영군 용남면 에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의전관(儀典官)인 김기철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正大夫) 당상관(堂上官)으로 관직생활을 하다 낙향 하여 고향인 통영에서 지내고 있던 중 한 호주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1890년대 어느 날 호주에서 온 선교사(아마도 아담슨 선교사)가 통영의 어느 우물가를 지나다가 마침 물을 길러 나온 부녀자들에게 다가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오해한 마을 청년들은 "왠 서양 오랑캐가 마을 처녀들에게 연애편지를 나누어 주느냐" 며 고함을 지르고 폭력을 휘둘러 선교사는 그만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김치몽은 곧장 우물가로 달려가 흥분한 사람들을 말려 돌려보내고 이 낯선 이방인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껏 치료하며 돌보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치몽과 서양 선교사는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었고 고마운 마음에 선교사는 본국에서 가져온 주방기구를 김치몽의 집에 설치해 주며 정성껏 차를 끓여 대접하였는데, 이것이 통영에 최초로 들어온 커피였다.

김치몽은 이러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받아 들였고, 그때부터 그의 집은 선교사의 전도무대가 되었다. 김치몽은 사람들을 모으고, 호주 선교사는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 그의 집 사랑채는 아예 예배장소가 되었다.

통영에서 전직 당상관이 개종을 했다는 사실은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정의 고위 관료였던 김치몽이 개종했다는 소문이 돌자 급기야는 그의 맏형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96년 설이 얼마 지난 후 김치몽 에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명절날 가족제례에 그가 참석하지 않자 집안은 왈칵 뒤집히고 말았다.

분노한 맏형은 사람을 보내어 동생 치몽을 데려와 상투머리를 대청 서까레에 메달고 혹독한 매질을 하여 유혈이 낭자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도 서러운데 저 놈 때문에 가문까지 망하게 되었다"고 고함치며 휘두르는 형의 매질을 그대로 두면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전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나면서 조선의 운명은 꺼져가는 등불과 같았으니 그의 분노를 이해 할 만도 하다.

그날 밤 김치몽은 형수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정든 고향 통영을 등지고 부산으로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이렇듯 통영의 커피는 호주선교사와 김치몽의 값비싼 댓가를 치른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자료 출처='제일 영도교회 100년사' 정리=서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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