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근대 통영교육의 시초가 된 호주선교사의 집,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갑오개혁 이전까지 한국의 교육은 서당, 향교, 성균관의 세 가지 교육기관들이 있었다. 이들 교육기관의 목표는 과거시험을 통해 나라의 일꾼을 뽑는 역할이었고 교육의 내용 역시 정치윤리의 기초가 되는 성리학이었다.

그나마 여성들은 교육을 받을 권리나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1894년 이후에 유교적인 교육체제는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근대적인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 했는데 내용도 인재등용에서 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학문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기관은 주로 서울에 집중 됐다.

이러한 조선의 교육여건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호주선교부의 초기 교육정책은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소년, 소녀들을 위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설립 하는 것이었다.

고등교육을 계속해서 받고자하는 학생에게는 평양에 있는 기독연합대학(숭실전문학교)과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보내었다.

1910년 결정한 호주선교부의 교육정책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여자 초등학교를 5개 지부(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에 각각 하나씩 세울 것
2. 선교지부 내에 여자 중학교 하나를 세울 것
3. 선교지부 내에 남자 중학교 하나를 세울 것
4. 대학은 세우지 않을 것

당시의 교육환경에 있어서 남녀가 불평등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여성교육 중심의 방침을 세우게 된 것은 가히 개혁적이라 할 수 있는데 호주선교사들이 볼 때 조선의 남존여비 사상의 폐단과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은 호주 빅토리아주 안의 교회 연합 여전도회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기 때문에 여권신장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교사 파송 주체가 여성으로 구성된 여전도회라는 특수성 때문에 호주선교부가 경남지역 선교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교육이었으며 특히 관할 5개 선교지부마다 유아들을 위한 유치원 교육이 중요시 되었다.

그리고 호주선교부가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교육선교활동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 데는 여자 선교사의 역할이 컸다고 볼 수 있다.

1889년에서 1941년까지 부산과 경남에서 활동한 호주선교사들의 숫자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모두 78명의 선교사 중 남자 24명(31%), 여자 54명(69%)이고 이중 미혼 여성은 34명으로 43.6%를 차지한다. 이렇듯 약 2/3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선교사들의 헌신적인 교육으로 많은 인재들이 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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