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선교사를 꿈꾸던 팔망미인 공덕귀, 대한민국 최고의 자주적 사회운동가 되다

▲ 4.19 혁명후 1960년 8월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이 된 해위 윤보선, 두 아들 상구, 동구와 함께 1년 8개월간의 청와대 생활을 한 공덕귀 여사. 아주 조용한 영부인으로 불렸고, 이후 자주적 삶으로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회복에 앞장선 사회운동가였다.
젊은 시절의 공덕귀.

4월을 기다렸다. 꽃처럼 화사하고 새싹처럼 영롱한 봄의 노래가 판데목 건너 해피에서 조개파는 어머니들의 굽어진 등 위로 아지랑이 피어나듯 들려온다. 봄바람이 불어오듯 통영에도 개화의 바람이 불고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호주선교사들의 영향이 크다. 이들에 의해 길러진 인재들 중 여성지도자로서 최덕지와 공덕귀의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감동과 자랑으로 와 닿는다.

최덕지가 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로서 해방 전 민족의 독립을 외쳤다면, 공덕귀는 신학자로서 해방 후 여성문제와 인권회복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큰 족적을 남겼다.

공덕귀는 1911년 4월 21일 명정동에서 공도빈과 방말선(공마리아)의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과 여학교시절 등 생애 찬란한 시기를 암울한 역사 속에서 보냈지만 해방 후 그녀의 삶과 흔적은 아름다운 봄꽃처럼 피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주일이 되면 어린 딸들을 곱게 단장 시켜 앞세우고 대화정 교회(현. 충무교회)로 갔다. 예배가 끝난 오후에는 곧장 호주선교사가 운영하는 진명 유치원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어머니는 호주에서 온 여선교사들과 즐거운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선교사들이 치는 풍금소리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며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였다, 그러한 영향으로 어머니의 이름은 방말선이었으나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공마리아라 불렸다.

공덕귀는 어릴 적 호주선교사들로부터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웠다. 그녀는 어린 시절 이순신 장군이 통영사람이라고 굳게 믿을 만큼 통영과 이순신을 하나로 생각했다. 어느 날 소학교 선생님이 이순신 장군이 어디에서 태어난 분이냐고 물었을 때 손을 번쩍 들고 의기양양하게 "통영이요" 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고 한다. 그 대답을 들은 반 친구들 모두가 웃던 일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진명 유치원과 통영보통공립학교를 졸업 한 후 호주 선교사의 추천으로 동래 일신고등여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하던 중 뜻밖에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그녀의 나이 14세였다. 어린 공덕귀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국군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국군이 해산을 당하는 비운을 맞고 나라 잃은 백성으로 천추의 한을 품고 낙향, 시골 통영에 묻혀 살았다. 일본인에게 당한 충격과 분노 속에 삶의 의욕을 잃고 폐인처럼 살았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 공마리아는 6남매를 가슴에 부둥켜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이 어린 것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절박한 현실 앞에 그녀의 어머니는 처절한 몸부림쳤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래지 않아 다른 면모를 자식들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가졌던 어머니는 놀라울 만큼 빨리 아픔을 털고 일어서기 시작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늘과 실 그리고 재봉틀과 씨름을 했다. 마리아의 바느질 솜씨는 특별해서 언제나 일감들이 쌓였고, 그로 인해 형제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없이 자랐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동래 일신고등여학교 공부가 좌절된 공덕귀는 호주선교사가 운영하는 진명유치원 조보모(보조교사)로 일하며 밤에는 진명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3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스키너 선교사의 추천으로 꿈에도 그리던 동래 일신고등여학교에 입학을 했다. 공덕귀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 시기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공덕귀의 감성과 숨겨진 재능은 맘껏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고 지적 호기심이 많았으며 음악과 체육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피아노는 물론이고 원반던지기, 테니스, 넓이뛰기, 삼단높이뛰기, 수영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특히 수영은 단거리 선수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녀를 보고 친구들은 만능 재주꾼이란 별명으로 '만가지 약장수'라 불렀다.

4년 후 졸업을 할 때 공덕귀는 전교 최우등상, 도지사 상, 4년 개근상 등 모든 상을 휩쓸다 시피 했다. 그녀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이유는 졸업 후에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였다. 인도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본 요코하마 신학교로 유학을 갔다.

1948년 일본 유학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와 조선신학대학에 전임강사로 재직, 미국 명문 프린스턴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준비 하던 중 주변의 권유로 당시 서울 시장으로 재직하던 윤보선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고,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의 영부인이 됐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에 2번씩이나 일본 경찰에 연행, 고문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행동하는 신학자로서 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인권회복과 여성문제, 교회일치운동을 전개한 한국의 탁월한 여성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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