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제1호 의사와 간호사, 테일러 선교사 부부, 섬도 한센병도 가리지 않고 용감했다

▲ 서양집으로 불린 호주선교사의 집은 통영 제1호 서양식 의사인 테일러가 살면서 치료하던 집이라는 의미로 테일러 하우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두 개의 양관(洋館·서양집) 중 아래 양관이 테일러 하우스이다.
▲ 1937년 6월 부산에서 찍은 호주선교사들의 단체사진. 이 한 장의 사진에는 통영에서 활동한 20여 명의 호주 선교사 가운데 10여 명의 모습이 담겨 있다. 둘째줄 왼쪽에서 4번째, 5번째가 1914년 통영 최초의 서양인 의사와 간호사로 진료소를 설립하고 진료한 테일러 부부다. 부인 역시 호주에서 파견한 제1호 간호사로 어린이보건센터를 운영했다. 부부는 섬마을 진료 뿐 아니라 나환자 병원 설립까지 시도했다. 세 번째 줄 맨왼쪽 서있는 사람이 1928년 통영에서 의료선교활동을 했던 트루딩거 선교사, 앞쪽 의자 앉은 사람이 부인이다. 유능한 간호사였다. 이 밖에도 알렉산더와 맥카그, 멕켄지, 레인 선교사 부부도 한자리에 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을 가장 불안하게 하며 끊임없이 괴롭혀 오는 것은 무엇일까? 전쟁일까, 아니면 굶주림 일까? 전쟁이나 굶주림은 일시적인 것이며 협력과 나눔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질병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의료인의 노력을 무색케 할 만큼 의료기술을 앞질러 또 다른 질병으로 인간에게 다가 온다.

한국인의 역사 중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대라 할 수 있는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무너진 시대였다. 주변정세의 흐름과 세상의 이치에 무지했던 조선인들에게 일제는 갖가지 권모와 술수, 협박과 침탈로 괴롭혔고, 이로 인한 굶주림과 질병이 인간의 생명을 무참히 앗아 갔다. 간단하게 치료만 하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하찮은 질병에도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많이 갔던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서구 사회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 수 없었다.

1913년 조선에 도착한 의사 테일러 선교사는 근대식 의료시설이 전무했던 터라 조선어를 공부하며 진료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 나갔다. 그는 1912년 영국의 에딘버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호주 뉴 헤브라이즈에서 처음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 다음 해 조선에 왔다. 1915년 통영에 도착하자 진료소를 개설하고 투약과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섬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다. 다도해를 이루는 통영은 수많은 섬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거친 바다 환경에 노출, 이로 인한 질병이 다른 육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통영의 특수한 환경과 사정을 호주의 고향 교회에 알려 도움을 호소했고 그 결과 Young Men"s Fellowship Union의 도움으로 작은 배를 구입하여 여러 섬 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주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돌보며 위생적인 생활에 대한 교육도 시켰다.

당시 섬에 사는 주민들은 질병과 이로 인한 조기사망을 운명처럼 받아 들였는데 이러한 이들에게는 상상 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났다.

테일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한센병을 천형이라 생각하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비참한 삶을 이어가던 이들을 위해 한센병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9년에는 입원환자를 위한 병실 2개가 있는 작은병원(Cottage Hospital)을 세웠다. 테일러의 부인은 호주선교부가 조선에 파송한 첫 번째 간호사이기도 한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이곳 통영에서 역동적인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1915∼1923년 통영에서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세워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았던 테일러는 호주선교 본부에 의해 진주 배돈병원(Paton Memorial Hospital)으로 임명을 받아 떠났다.

테일러 선교사가 떠난 후 부터 의료혜택은 끊어졌으나 곧 3년 뒤인 1928년 트루딩거(M. Trudinger, 한국이름 추마전) 선교사 부부가 통영에 부임해 왔는데 그의 부인은 유능한 간호사로 테일러를 이어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는데 열심을 다했다.

특히 그녀는 부모와 어린이에게 말할 수 없이 많은 유익을 주었던 아동복지 진료소(Baby Welfare Clinic)를 운영했다. 이들 선교사 부부가 1938년 통영을 떠나 부산선교부로 가기 까지 10년 동안 이 지역에 베푼 의료 혜택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후 곧바로 레인(H.W. Lane) 선교사 부부가 통영으로 부임을 했는데 그의 부인도 간호사여서 그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한 1941년 까지 의료혜택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의사 선교사가 귀한 시절에 그래도 통영은 끊어지지 않고 의료혜택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테일러 선교사는 1938년 8월 일본 요코하마에서 갑작스레 사망했는데 그의 나이 61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통영주민들과 진주 배돈 병원은 깊은 애도에 빠졌다. 그는 그곳에 묻혔고 얼마 후 그의 부인은 25년 전 남편과 함께 의료선교사로서 호주를 떠나 조선을 향하던 때와는 달리 혼자 쓸쓸히 본국인 호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호주에 도착한 테일러 부인은 평생을 멜버른에 살면서 경건한 신앙생활과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했다. 그리 길지 않는 인생 속에서 그들 부부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진솔했으며,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들을 본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 오늘처럼 글로서 회자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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