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島) 연육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 시조는 1593년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근무지인 통제영 본부였던 제승당(制勝堂)에서 늦은 밤 수루(戍樓)에 앉아서 나라 걱정을 하면서 읊은 한산도가(歌)이다

한산면은 넓이30.39㎢로 34개 마을에 2,200여 명의 인구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1차산업 위주였던 1970년대 중반에는 인구가 13천명에 이러렀고 초등학교가 13개, 중학교가 1개소였으며 한때는 중학생이 830명까지 되었다.

통제영 본부가 두룡포(지금의 통영시 문화동)로 옮겨 세병관을 중심으로 12공방이 설치되어 모든 군사에 필요한 물자를 자급자족 했듯이 한산섬 통제영 시절에는 섬(島) 자체가 군사 전진 기지였다. 군량미 창고가 있던 창동(倉洞)마을, 병기를 만들었던 야소마을(冶所),소금을 구었던 염개(廉浦), 군복을 벗어 바위위에 말렸다는 의암(衣岩), 군수품을 어깨에 메고 선박에 싣고 내리고 했다는 멜개(荷浦), 일본 대마도가 육안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봉화대가 있었던 망산(望山) 등등, 지금도 당시의 흔적들을 볼수 있는 임진왜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살고 있는 한산면 (한산섬을 비롯하여 11개 섬)주민들의 최대 숙원 사업은 '연육교' 건설이다. 지금은 자동차를 싣고 가는 여객선이 시간 단위로 한산섬을 운항하고 있어 필자의 어릴적 시절하고는 교통이 개선되고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낮 시간대 육지(통영시내)로 나오는 데는 어느 정도 불편이 해소 되었다고 할수 있겠으나 해가 지고 뜰때 까지는 인적이 드문 캄캄한 밤이다. 밤중에 위급 환자가 발생하면 환자 이송이 어려워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육지 출신 출향인들은 밤낮 시간대 관계없이 고향을 다닐 수가 있지만 한산섬 출향인들은 낮 시간에만 다녀야 하는 어려움이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한산면 주민들과 출향인들의 숙원 사업은 '연육교' 건설이다. '연육교' 건설 이야기는 2002년 지방선거 때 선거 공약사업으로 얼굴을 내밀은 이후 도지사, 국회의원, 시장, 도의원, 시의원 출마자들이 2012년 지방선거 때 까지는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일명 선거때 만 나타났다가 선거가 끝나면 사라지는 선거의 다리(교량)다. 집행기관인 도지사와 시장은 선거 때 공약했던 사업들을 실천하기 위하여 공약실천 계획서를 작성하고 매년 이행 실천 보고회를 개최하는데 여기까지도 포함되어 언론에 보도 되기도 했다.

2011년도에는 지역 국회의원이 국비 10억원을 확보하여 타당성 조사 용역을 실시한 바 있는데 결과는 매일봉~방아섬~화도(거제)~관암~추봉~거제(학동)으로 이어지는 제1노선의 B/C가 0.65로 나와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용역보고서 내용이었다. 그 이후 한산섬 연육교 건설은 2012년 이후 선거공약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추진이 중단된 상태인데 명확한 설명 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정말 지금의 한산면들이 숙원 사업인 '한산섬 연육교'를 살아 생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할까?

저작권자 © 한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