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선교사가 통영 오게 된 '예양협정(禮讓協定, Comity Arrangement)'을 아시나요?

국내에서 60년간 헌신적인 의술을 펼친 호주인 선교사 가족이 카메라에 담은 우리나라 근현대 사진 9천장 중 2천장이 지난해 경기대박물관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됐다. 1910년 한국에 온 호주선교사 매켄지 부부와 그의 두 딸 매혜란과 혜영 자매가 그 주인공이다. 왕대선 선교사 부인의 병으로 인한 귀국으로 부산에서 근무하다가 임시로 통영선교부에 파송, 192년 3월 17일(56회), 1926년 8월 3일(58회)까지 참석, 당회장 목사와 같이 회무처리에 참여했다. 특히 이들 부부는 부산 '상애원' 맡아 한센인 돌봤고 두 딸에게 한국 이름 매혜란·혜영으로 이름 지었다. 두 딸은 의사·간호사로 자라 6·25때 한국으로 귀국, 1952년 부산 일신기독병원 설립한 인물들이다. 전국 25개 도시 의료 봉사하며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을 2010년 유족이 한국에 기증, 경기대박물관이 5년간 정리해서 지난해 첫 공개했다. 1953년 부산 일신기독병원 임시병동 모습을 비롯 근현대 한국인의 삶의 기록한 무려 9천장의 귀중한 사진을 남겼다.
1915년 호주인 선교사 제임스 매켄지(뒷줄 오른쪽 둘째)와 가족들.

기독교의 전래와 복음 전파에 교육과 의료 활동은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해 왔다. 이러한 활동은 기독교 전래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대상 국가의 의료 발전과 복음전파 그리고 교회 설립에 중요한 동력원이 되기도 했다.

선교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볼 때 천주교의 경우 마테오 릿치(Matteo Ricci)의 활동에서 보듯 천문학을 통해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면, 개신교는 근대식 교육과 의료선교를 통해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고자 했다.

기독교가 전래될 당시 부산과 경남 지방의 의료상황은 경험적 의술의 전통적인 한의학 외에는 무속신앙과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던 알렌(H. Allen)은 미국 공사관 대리 공사인 폴크(G. C. Foulk)를 통해 조선 왕실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의했고, 고종의 윤허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설립됐다.

알렌의 입국 이후 많은 의료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해 907년에는 조선의료선교사협의회(The Korean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조직, 여러 나라에서 온 의료선교사들 간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1938년 당시 의료선교사 수는 무려 328명에 달했다. 교파별로 보면 미국 북장로교 84명, 미국 남장로교 44명, 미국 북감리회 59명, 미국 남감리회 32명, 영국 성공회 31명, 캐나가 연합교회 22명, 안식교 10명, 호주 장로교를 포함한 독립선교사 35명 등 이었다.

조선에 왔던 이들 의료선교사들 중 헤론(J. W. Heron), 제임스 홀(W. J. Hall), 랜디스(Eli Barr Landis), 오웬(C. C. Owen) 등은 밀려오는 환자들로 인해 격무와 과로로 순직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질병과 환경이 열악하였다는 것을 이들의 순직을 통해 알 수 있다.

기독교 전래과정에 있어서 선교사에 의한 의료 활동과 복음전파는 두 가지 양태를 볼 수 있다.

한양의 경우엔 의료 활동이 기독교 복음전파 활동 보다 먼저 시작된 반면, 부산 경남 지방은 의료 활동이 복음전파 활동 보다 나중에 이루어 졌다.

부산 경남 지방에서 활동한 최초의 의료선교사는 하디(Robert Hardie)로 그는 1891년 4월부터 1892년 11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부산에서 활동 하다가 원산으로 갔고, 그의 뒤를 이어 브라운(Hugh. M. Brown)이 자신의 집에 시약소를 개설하고 의료 활동을 했다.

부산 경남의 사람들은 이 지방의 유일한 의사인 브라운에게 상당한 기대를 했으나 병원 설립에 필요한 마땅한 건물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한적인 의료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결핵에 감염, 1893년 본국으로 귀국했고 그 후 3년 뒤인 1896년 세상을 떠났다.

의료선교사가 집중된 한양의 경우에도 이같이 격무와 과로로 순직하는 선교사가 다수 발생 되었는데 부산 경남 지방의 경우는 환자나 의사의 고충이 더 열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부산 경남은 190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로 두 선교부가 지역분담 조정에 합의, 경남의 남서쪽 지방을 호주선교사들이 전담하기로 했다.

이 협정을 '양국의 선교부간 상호 존중과 양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 졌다' 하여 '예양협정(禮讓協定, Comity Arrangement)' 이라 한다. 이로 인해 호주에서 온 의료선교사들은 이 지역에서 집중적 의료 활동을 함으로서 한양에 못지않은 의료혜택을 지방민들에게도 베풀 수 있었다.

통영은 1914년 호주선교사 테일러(Dr. Tayler)가 최초의 의사로 9년 동안 섬지역 주민을 포함 지역민들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었고 이어서 나환자 병원을 설립 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의료선교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복음 전파를 위한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이었으나 한국에서의 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근대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의료선교 활동이 남긴 공헌은 시료(施療)와 시약(施藥)을 통해 조선인의 육체적, 정신적, 혹은 심리적 아픔을 치료하고 재활과 재생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들의 활동은 오늘 날 한국의 의료 수준이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위치에 까지 이르게 한 밑거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료선교 활동은 서양의술의 전파를 통해 한국 의학의 발전에 기여했고, 의학교육과 의료인 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고종의 전의(典醫)였던 에비슨(O. R. Avison) 박사는 1900년대 초반 의료선교활동이 남긴 공헌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호열자나 각종 전염병이 발생 했을 때 의료선교사들의 시약, 시료, 종두 등 예방과 치료활동을 통해 병이 미신과 악신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줌으로서 인간을 미신적 공포에서 해방 시켰다.

둘째, 종두(종두)의 보급에 의한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됐다.

셋째, 이웃을 돕는 사랑의 정신을 구현함으로서 구제 사업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넷째, 예방, 시약, 시료, 공중위생 및 보건증진 등 각종 의료 활동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전파됐다.

다섯째, 의학교제의 번역 및 의료관계 저술을 통해 한국에서의 과학교육 혹은 의학교육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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